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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김선명’을 보라
[문화비평] ‘김선명’을 보라
  • 홍승용/ 대구대·독어독문학
  • 승인 2007.10.01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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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그저 축복하고 권장할 만한 일인가. 혹시 피하거나 막는 편이 차라리 나을 때는 없을까. 세간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한 영화 ‘선택’은 신념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하다. 자율성이라는 화제를 던지며 학생들을 반강제로 ‘선택’의 세계로 끌고 갔다.

주인공 김선명과 안학서 등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은 반세기 가까운 혹독한 감옥생활과 고문까지 감수하면서 끝까지 자신의 정치적 믿음을 고집한다. 그로 인한 가족들의 불행이나 반공독재정권 치하의 반인권적 탄압에 대해 무슨 긴 덧말이 필요하겠는가. 주제로 보면 딱딱하고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영화지만 주요 인물들이 쉼 없이 겪는 적나라한 폭력들로 인해 헐리우드 액션물에 길들어 있는 학생들도 군소리하지 않고 몰입했다. 양심수들의 수난을 함께 겪으면서 우리는 국가보안법과 전향공작의 반인륜적 역사를 부끄럽고 역겨운 대상으로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김선명은 자신의 자유가 감옥 바깥에 있지 않고 감옥 안에서 양심을 지키는 데에 있었으며, 그런 운명이 두렵지만 자신의 운명이기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요지부동의 양심수인 것이다. 그런데 전향공작을 전담하는 중정요원 오달식도 공산주의는 인류의 영원한 적이라는 뿌리 깊은 확신에 근거해 반인륜적 폭행과 고문을 지시한다. 그 역시 애국자임을 자처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형식상으로는 김선명과 다름없는 확신범인 셈이다.

하나의 신념이 다른 신념을 말살하려는 태세로 달려들 때면, 카메라나 작가 혹은 전달자의 은밀한 명령에 그냥 따를 것이 아니라 그 신념들의 내용부터 살피는 편이 현명하리라. 김선명의 신념 내용은 소박하다. 부자, 가난뱅이 없이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통일세상이 그 골자다. 이는 오달식의 눈에 빨갱이들의 망상과 오만으로 보일 뿐이다. 그의 확신 속에는 빨갱이들에게 땅과 부친을 빼앗긴 체험이 박혀 있다.

그러나 오달식의 완고한 반공주의는 우리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대학 다니는 자식들에게조차 떳떳하게 말하기 어려운 흉물이 되고 만다. 김선명의 신념도 평등 알레르기가 있는 귀족들에게는 여전히 실없는 망상이나 선동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날의 극심한 양극화 현실에 비춰보면 평등한 통일세상이라는 것은 절대다수 서민 대중들의 꿈으로 자리 잡아도 좋을 법해 보인다. 그것은 현실사회주의의 시체와 묶어 함께 파묻어 버릴 과거가 아니라 공생과 나눔을 추구하는 인류사회의 미래인 것이다. 

김선명의 선배 이영윤은 좋은 선배 혹은 민중적 지식인의 한 모범으로서 관객을 압도한다. 평소 느긋하고 온화한 언행으로 동료들만 아니라 전향공작원들까지 인간적으로 대하는 그는 가혹한 탄압국면에 부딪칠 때마다 앞장서 몸을 던져 저항한다. 고문자들을 향해 내뱉는 그의 비명은 “이놈들아 인간답게 살아라!”였다.
끈질기고 치밀한 전향공작으로 사상범들 모두가 위기에 몰리게 되자 그는 김선명에게 누군가가 나서야 탄압이 끝나리라고 말한다. 그 누군가는 바로 이영윤 자신이었고 나서는 방식은 스스로 인간답게 죽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신념을 위해 누가 그처럼 끊임없는 고통을 견디고 목숨까지 던질 수 있으랴. 영화를 함께 본 학생들이나 어느 누구에게도 김선명이나 이영윤의 뒤를 따르라고 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김선명이나 안학서 혹은 이영윤과 달리 가족 때문에 전향을 결심하는 최동지를 대할 때에도 혐오나 경멸 이상으로 인간적인 이해와 민족사적 비극에 대한 반추가 어울리는 반응일 것 같다. 반복적인 고문에 흔들리는 남동지의 모습도 이야기의 신빙성을 높여준다. 

나 역시 김선명과 이영윤의 길을 뒤따를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겁 많고 속 좁은 나에게 어지간한 위협이나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말고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기를 불어넣어 준다. 오달식은 그 길 혹은 신념의 객관적 의미를 살펴보라고 가르쳐 준다. 애국한다면서 어느새 반인륜범이 돼 있거나, 민족과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면서 민중들의 고통을 키우는 데 앞장서는 일이 왜 없겠는가. 축복이 아닌 고통으로 누벼진 그들의 삶이 이 삭막한 신자유주의 전투체제에 시달리는 새가슴들에게 자율과 반성과 여유의 축복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의미들로 꽉 짜인 ‘선택’의 무거운 공간을 벗어나 경쾌한 인터넷의 일상으로 들어서도, 영화 주인공들에 대한 직접적 폭력과 그들의 수난으로 압축 표현된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들은 전혀 해소되지 않은 채 재생산되고 있다. 이제 그것들은 정치인 개개인들과 정치집단들 혹은 그 지지자들 사이의 쉼 없는 대거리로, 서로를 향한 기발한 야유와 조롱으로 희석되고 희화된 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의 정치 감각과
유머감각을 단련시켜 주며 경박한 흥분을 선사한다.

한동안 불꽃 튀기던 땅떼기 검증공방 대신 불거진 권력형 스캔들은 대선이 끝날 때까지 우려먹어도 남아넘칠 것 같다. 그로써 권력과 비리의 끈적끈적한 인연에서는 어느 집단도 예외가 되기 어려움을 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스떼기니 버스떼기니 혹은 단일화니 흥행이니 하는 밋밋한 이슈로는 쉽사리 틀어 막힐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선명이 양심과 신념을 지키려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투쟁한 것과 꼭 같은 세월, 그러니까 장장 45년간을 묵혀놓은 삶의 지혜라며 마시지걸 고르는 비법 따위를 내놓는 후보가 선두를 질주하는 대선판은 얼마나 우습고 한심스러운가. 그와 연루된 끝 모를 의혹들과 그의 경박하고 위압적인 언사들을 필사적으로 감싸고 축복해주는 보수언론들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

난무하는 폭력의 어휘들과 저항의 댓글들 속에서 평등세상을 향한 김선명의 소박한 꿈이 어떤 모습으로 실현되어갈지 눈여겨보고 싶다. 무지막지한 개발과 차별을 끝없이 확대하려는 성장과 패권의 정책들로 허망하게 깨어지고 짓밟힐지, 아니면 요즘 새삼 떠오르는 표현으로 사람중심의 사고방식 덕에 조금은 힘없는 서민들의 눈앞에까지 희망이 다가올지 아직은 예단할 때가 아닌 듯하다. 이러한 긴장이 우리 사회를 관류하고 있어 즐겁다.

홍승용 / 대구대 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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