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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론’에 냉소적 …“名博 기준 엄격하게 따져야”
‘현실론’에 냉소적 …“名博 기준 엄격하게 따져야”
  • 교수신문
  • 승인 2007.09.1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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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_ ‘명예박사’ 이대로 좋은가

“대학이 명예박사학위를 정당성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특정인에게 수여할 때, 학문은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속돼 도구화의 길을 걷게 되고 대학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월 28일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이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를 추진하던 총장에게 보낸 의견서의 내용이다. 철학과 교수들과 대학원생의 반발로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무산됐다.
이 일은 최근 대학가에서 이례적인 사례로 꼽혔다. 조윤호 전남대 교수(철학과)는 “학교 내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당수 구성원들이 철학과의 반대 입장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의 사례가 이례적인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대학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명예박사는 어느 정도 배출되고 있을까.

2006년 현재 박사학위 과정이 설치된 대학(대학원 대학 포함)은 1백47개.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1948년부터 2006년 2월까지 60여 년 동안 배출된 명예박사는 3천348명이다. 명예박사학위 수여가 급증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명예박사학위가 ‘남발’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993년 12월 ‘명예박사학위수여승인규정’이 폐지되면서부터 확실히 늘었다. 1994년까지만 해도 한 해 명예박사는 30~40명씩 배출됐지만 1997년에는 125명까지 급증했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150명 이상 명예박사학위가 수여되고 있다. 한 대학마다 매년 1명꼴로 명예박사를 배출하고 있는 셈이다. ‘남발되고 있다’는 문제제기는 배출수보다는 명예박사학위 수여 원칙에 걸맞은 인물에게 수여되고 있느냐는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지난 2004년 9월 당시 열린우리당 유기홍·최재성 의원이 공개한 명예박사 수여 전체 현황을 보면, 지난 60여 년 동안 교육계 인사가 전체의 30.6%를 차지한데 이어 경제계 인사가 27.4%를 차지했고, 정·관계 인사는 23.3%로 나타났다.

대학들 홍보효과·기부문화 활성화 기대
지난 2000년 서울대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게 기업인에게는 처음으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로 읽힌다. 서울대는 이 회장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국내 인사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앞으로의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서울대 경영대 교수들은 “교수들의 의견을 전혀 묻지 않은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한다”며 선정 원칙과 절차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한 교수는 “돈을 받고 재벌에 명예를 파는 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 기업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요건 가운데 ‘재정능력’이 가장 주요하게 대두되고 있고, 대학의 홍보효과와 함께 기업의 건전한 사회 투자를 유도해 사회적인 기부문화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고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팔무 한림대 교수(사회학과)는 이렇게 설명했다. “돈의 위력이 예전보다 커진 것이 사실이다. 교육도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편입되면서 학교 시설과 취업률, 산학협동이 강조되면서 대학과 기업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긴밀해진 결과다.”

기업과 대학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대학들은 ‘현실론’을 펴고 있다. 대학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서 등록금에만 의존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정부지원이 늘어나기만 바라기도 힘든 상황에서 자구책 마련을 위한 ‘선택’이라는 입장이다. 대학 입장에서는 재정난 해소 창구가 되고 있는 것.
최근 기업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대학들이 밝힌 배경을 보면, 로스쿨 추진을 위해 필요한 법학관 건물을 기증받거나 동문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매년 대학발전기부금을 내고 있고, 수백억 원씩 기부금을 내는 동문이나 기업인에게 “모른 척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이유다. 명예박사학위가 ‘經-學 커넥션’의 유력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명예박사, ‘經-學 커넥션’ 활용?
그러나 교수사회는 무분별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다.
얼마 전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인문학부)는 계간 <창비> 가을호에서 지난 2005년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한 고려대를 언급하면서 “고려대라는 이름의 ‘힘’과 삼성이라는 ‘힘’이 만나 명예-광고효과와 돈을 서로 교환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문을 일으키지 않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고려대가 시장논리에 전면적으로 포섭돼 삼성이나 LG와 맞물릴 만한 교육계의 ‘재벌’로 새롭게 부상했다”고도 밝혔다.

냉소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다. 평교수들은 명예박사학위 추천이나 심의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대학원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치지만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총장의 고유 권한으로 개입할 여지가 많지 않다는 현실도 작용하고 있다.
김석진 경북대 교수(경영학부)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 뭔가를 주고받는 경향이 짙다”면서 “명예박사는 ‘딜’”이라고 말했다. 동국대의 한 교수는 “기업과 대학의 관계가 긴밀해지더라도 지금은 너무 노골적”이라고 평가했다.

연세대 자연대학의 한 교수는 “특별한 의미도 없이 수여되고 있는 명예박사학위는 차라리 없애야 한다”고 잘라 말한다. 경제학을 전공한 대구대의 한 교수도 “오히려 ‘불명예 박사’라고 부르는 게 맞지 않나. 정말 받아야 할 분들은 안 받으려고 하고, 명예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기부금을 내놓고 요구를 하고 있으니 명예박사제도 자체를 없애는 게 낫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명예박사를 받고서 명함에는 박사만 새겨 넣기도 한다”면서 “학벌사회에 일조하는 일도 있다”고 덧붙였다.

“차라리 ‘감사패’가 더 낫지 않나”
유팔무 한림대 교수는 “어떤 대가가 따르는 명예박사라면 차라리‘감사패’를 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전했다.
무엇보다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준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석우 경희대 명예교수(사학)는 “명예박사제도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면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본래 취지에 맞게 고쳐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명예교수는 “각 대학마다 명예박사 수여 기준과 원칙이 있을 것인데 현실에 쫓겨 눈앞의 이익에 안주하기보다는 기준과 원칙을 보다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도 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모습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에서 협조를 요청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헤외의 경우 지난 2004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교수와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고, 영국 옥스퍼대도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명예박사학위를 요청했으나 ‘학문적 업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한 적이 있다.

명예박사의 ‘명예’는 대학이 스스로 권위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들이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를 반대하면서 제출한 의견은 되새겨 볼만한다.
“우리는 항상 학생들에게 진리추구에 대한 강한 의지와 현실의 불의에 대한 끝없는 저항을 말해 왔습니다. 대학의 정책 판단은 때로는 정치적 전략적일 필요도 있지만 대학은 교육기관이고 우리는 교육자라는 것을 무겁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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