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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유토피아, 전쟁의 나라
[딸깍발이] 유토피아, 전쟁의 나라
  • 교수신문
  • 승인 2001.11.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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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1-12 17:50:32
토마스 모어는 1516년 사형제도가 부당함을 논증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불법적 살인에만 적용한다면, 혹은 인간 제도에 의지하여 사형을 행하는 자를 절대적 계명으로부터 면제시켜 준다면, 모든 계명은 인간의 법 안에서만 타당한 것이 되고 만다. 현실은 모어의 논증에 죽음으로 대꾸했다.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김수영).

그러나 유토피아에서도 전쟁의 법칙은 작동한다. 적을 지혜로 굴복시키는 일이 가장 자랑스럽지만, 무력 행사와 수치스러운 승리가 필요할 때도 있다. 자국이나 우방의 보호, 독재자의 축출, 침략에 대한 보복, 때로는 상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전쟁은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된다. 손해를 입힌 자들을 반드시 인도하도록 하여, 사형시키거나 노예로 만든다. 첩자를 보내고, 암살을 교사하는 전단을 뿌리고, 매수를 통한 내분을 일으킨다. 전투 없이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의 사용조차 현명한 선택으로 평가받는다. 유토피아는 완벽한 전쟁의 나라다.

모어의 생각은 현실의 세계로 내려오면서 대단히 짧아졌다. 평등과 관용의 가치를 옹호하던 휴머니스트의 높은 이상은 고관대작의 책상 위에서 하찮은 장식물로 전락하였다. 현실은 인간 이성의 무덤이다. 16세기의 유토피아는 초기 부르주아사회에서 잠들지 못하는 양심을 달래어 주는 희미한 거울일 뿐이다.

더구나 전쟁에 관한 한, 현실은 유토피아보다 훨씬 더 철저하다. 수치스러울지라도 승리는 끝까지 추구한다. 전쟁을 정당화해 줄 현실은 항상 존재한다. 독재자는 널려 있고, 침략과 불법은 만연해 있다. 첩보전과 비밀공작은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다만 현실의 전쟁은 유토피아에서처럼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으로도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현실은 영원한 전쟁 상태며, 더욱더 완벽한 전쟁을 요구한다.

완벽한 전쟁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테러는 다른 형태의 전쟁이다. 더 이상 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선이 없는 전쟁은 완벽한 전쟁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평화를 위해 잘 계산된 전쟁은 다시 테러만을 허용할 것이다. 현실의 복수에 목을 내어놓았던 모어는 농담을 던진다. 인간의 계산은 대단히 짧으니, 역사의 복수를 조심하게.

사형제도에는 반대지만, 평화를 위한 전쟁에는 찬성이라고? 그대, 유토피아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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