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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답잖은’ 사진붐 … 인프라도 인력도 콘텐츠도 없다
‘시답잖은’ 사진붐 … 인프라도 인력도 콘텐츠도 없다
  • 이영준 / 계원예대· 이미지비평가
  • 승인 2007.09.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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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_한국의 사진문화

나의 대학원 때 은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영준아 요즘 사진이 뜨니까 얼마나 좋으냐. 사진평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 니가 시작해서 이제 빛을 보는구나.” 그런데 은사님,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사진과 제가 생각하는 사진은 좀 다릅니다. 요즘 뜨는 사진은 ‘예술사진’입니다.
나는 이것이 영 못마땅하다. 겉으로는 사진전시가 많아지고, 작품도 많이 팔리고, 전에는 사진이라면 예술로 취급도 안 하던 화랑들도 사진을 취급하고, 사진에 대한 강좌도 많아지는 등, 시대의 대세는 단연 사진인 것 같다. 더군다나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미신’마저 퍼지고 있으니 이제 바야흐로 사진의 시대가 온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왠지 딴지를 걸고 싶어지는 것은 내가 꼭 심사가 비틀려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막 붐을 이루고 있는 한국사진의 지형도가 뭔가 잘못 그려지고 있다는 불안감 내지는 불만감 때문이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삶의 독특한 가치를 포착했는가
지금 뜨는 사진은 예술사진이다. 그러나 사진이란 단순히 예술분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은 과학, 보도, 역사, 문화유산, 인구조사 등 인간 활동의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있으며 날로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 황우석 교수 사태도 결국은 어떤 네티즌이 논문에 발표된 사진이 조작됐음을 밝혀냄으로써 크게 증폭됐음을 상기하자.
대부분의 대학 사진학과에서 사진을 예술로 가르치고 있는데, 이제는 예술의 범위 자체가 넓어져서 ‘조사연구에 토대를 둔 예술(research based art)’이 논의될 정도가 됐다. 즉 예술은 더 이상 독특한 존재로서의 작가의 감성에 의존하는 순수한 영역이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은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어야겠지만, ‘예술이 아닌 영역의 사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상당히 중요하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과학사진가를 양성해 내고 과학기술 관련기관에 취직시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위 있는 전문가가 되도록 해줄 것인가 하는 문제, 문화재 전문 사진가는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데 취직해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시청에 소속되어 홍보사진을 찍는 사진가는 단순히 찍으라는 대로 찍는 ‘찍사’가 아니라 어떻게 시정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전문가로 활동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사진가가 인류학자가 된다면 그의 기록은 어떤 양상을 띠어야 하며 그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 정보기관에서 일 하는 사진가는(실제로 그 수준이 별로 높지 않다고 알고 있다) 날로 고도화되는 정보, 첩보의 영역에서 사진을 어떻게 더 전문적인 수준에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등등, 사진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한도 끝도 없이 많다. 우리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을 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 동안 신나게 물질문명의 재화를 축적해, 대형 마트에 쌓여 있는 소비재의 수준을 보면 가히 선진국 수준이나, 문화를 들여다보면 후진국 수준이다. 특히 사진이 그렇다. 문화적 선진국이란 뭐냐 하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가니 공사장의 안내판에 사진 책임자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바로 이게 선진국이다. 문화에 대해 제대로 대접해 주는 나라. 한국에서 사진문화의 위상은 어떤가. 갤러리 안에서는 대접이 많이 나아졌다. 갤러리 밖으로 나가면 사진문화란 거의 없는 듯하다. 디지털 카메라 하나씩 걸고 레이싱걸이나 석양 찍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쓰레기일 뿐이다.
사진이 문화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삶의 여러 현장에서 사진이 가치 있는 표상이 되고, 사람들은 그 가치를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데 미리 주어져 있는 가치를 사진으로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삶의 독특한 가치가 형성되는 것이 사진의 문화적 차원이다. 아무개 작가가 작품을 2천만 원에 팔았다더라 하는 것은 절대로 사진의 문화적 차원이 아니다. 그냥 사진의 상업적이고 상품적인 차원일 뿐이다. 대형 할인점에서 독특한 상품을 파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소비자가 그 물건을 사서 삶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할 때 그게 문화다. 폐쇄적인 갤러리에 아무리 사진전시가 늘어나고 아무리 사진이 팔린다고 해도 절대로 문화가 아니다. 요즘의 사진붐을 내가 시답잖게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크로스오버’ 통한 새로운 탄생
한국이 사진 분야에서 문화의 후진국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사진이 대접 받는 꼴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의 어떤 면 때문에 후진국이라고 하는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알려면 열심히 광내고 때 뺀 것을 볼 게 아니라 아무런 준비 없이 평소에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된다. 문화적 수준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들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분야에서 사진의 문화적 수준을 볼 수 있는가? 역사적 자료가 되는 사진기록의 발굴과 보존, 해석, 과학실험과 관찰에 대한 정확하고 정밀하며 풍부한 사진기록, 기업이나 기관에서 자신들의 업적이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보존하고 활용하는 체제 (아직도 한국의 기업들은 제대로 된 사진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알지도 못하며 물론 갖추고 있지도 않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사진전문 큐레이터가 있는가, 이런 모든 면에서 한국의 사진은 그 수준이 최빈국 수준이다. 말하자면 사진의 저변이 되는 인프라도, 인력도, 콘텐츠도 없다.
사진이 살아남고 제대로 대접받으려면 여러 다른 분야와 크로스오버를 통해 새로운 지식의 유형을 창출해야 한다. 사진을 통해 가능한 물리학(이미 있다), 사진을 통해 가능한 천문학(이미 있다), 사진을 통해 가능한 법학(이것도 이미 있다), 사진을 통해 가능한 인류학(이것도 역시 이미 있다), 사진을 통해 가능한 의학(아주 많다) 등등 사진이 끼어들어가는 분야는 아주 많은 것이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도 어느 정도는 사진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그 수준이 아주 낮아서 거기서 풍부한 지식을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도 사진가들의 관심사는 “흑백사진의 톤을 어떻게 멋지게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관심은 “전기영동(electrophoresis) 사진에 필요한 흑백사진의 최적의 톤은 무엇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미 항공우주국의 과학자들은 화성에서 전송된 희미한 사진 한 장을 가지고 수십 편의 논문을 써낸다. 그게 바로 사진문화의 폭과 깊이다. 한국에서도 우주개발 한다고 난리인데, 사진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한번 보겠다.

이영준 / 계원예대· 이미지비평가


 

□ 고도의 추상미술이라 할 수 있는 미항공우주국의 화성 사진. 화성의 남극에 있는 스위스 치즈 모양의 이산화탄소 얼음이다. 선진국에서 ‘스위스 치즈 모양’이라고 장난스런 이름을 붙여 놓으면 후진국에서는 꼼짝 없이 따라야 한다. 그게 바로 문화적 수준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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