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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투어리즘과 제국주의적 시선
[딸깍발이]투어리즘과 제국주의적 시선
  • 전진성 / 편집기획위원·부산교대
  • 승인 2007.08.2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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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여행을 떠나는 계절을 맞아 남들에게 뒤질세라 우리 가족도 의기투합하여 인도네시아 발리 섬을 다녀왔다. 눈이 시릴 만큼 파랗디 파란 하늘과 강렬한 햇살을 파라솔처럼 떠받치고 있는 야자수들, 그리고 피부를 감도는 미풍이 어우러진 남국적 향취! 풍요로운 자연에 더해 선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는 힌두 사원마저 즐비했다. 자연과 문화가 앙상블을 이루는 정말 나무랄 데 없는 피서지였다. 다만 우리같은 외국인들이 망중한을 즐길 때 정작 현지인들은 허드렛일로 땀을 흘리고 있는 광경마저 이국적 풍취로 즐길 수만 있다면.
일종의 ‘효도관광’의 성격을 지닌 여행인지라 맞춤형 여행이 제격이었다. 아무런 불편함도 돌발적인 사고도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개성이 강하거나 글줄이나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의 ‘휴양’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베레모와 퀼로트를 착용한 젊은 괴테의 고상한 자태를 연상시키는 이른바 ‘빌둥스라이제(Bildungsreise 교육적 목적을 띤 여행)’의 이상, 안락함을 뒤로하고 기꺼이 신천지의 모험을 감수함으로써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은 진취적 기상…요즘 여행사들은 이런 ‘고급(?)’ 수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들을 앞 다투어 개발하고 있다. 문화체험, 오지탐험 등의 레테르가 붙여진 상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행들 간에는 분명 질적인 차이가 있다. 여행의 목적과 형식, 그리고 결과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의 여행은 어디까지나 투어리즘(tourism)일 수밖에 없다. 어디에, 어떻게, 누구와 가던지 우리는 항상 역(驛)과 호텔, 그리고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유형, 무형의 볼거리들을 만나게 된다. 몽고의 초원에 가서 게르에 숙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아프가니스탄에 선교 여행을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투어리즘이라는 파놉티콘(panopticon) 안을 맴돌고 있는 셈이다.
투어리즘은 우리 삶에서 잉여적인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규정한다. 우리는 세상과 공감하기보다 그것을 내 방식대로 ‘전유’하는데 익숙하다. 내 앞에 펼쳐진 세계는 내게는 낯선 이국적인 풍물로 가득차있다. 우리는 이들을 전유함으로써 자아의 영토를 확장시키려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여행자다. 다소 논리를 비약시키자면, 세계를 대상화하는 여행자의 시선이란 그 자체로 제국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 투어리즘이 등장한 시점이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호령하던 시대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국주의 시대이래 만연된 ‘세계의 투어리즘적 전유’에 세계를 자기 방식대로 전유해가는 자본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본은 넉넉한 주인의 배포를 과시하듯, “세계는 넓고 (구경)할 일은 많다”며 허세를 부린다. 우리는 초국적 자본이 관리하는 초국적 투어리즘의 파놉티콘 안에서 마음껏 소비하도록 초대받았다. 값싼 여흥이든, 문화재든, 서비스든 이를 소비할 자유밖에 없다면 차라리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소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능한 한 내 주관대로 고집스럽게 소비하자. 현지의 싸구려 토산품을 사는데도 주저하지 말자. 그것이 자본의 공세를 역이용하여 투어리즘 바깥의 세계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유일한 길이라면.

전진성 / 편집기획위원·부산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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