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철학의 부재, 정책·행정의 위기로
수요자 중심교육 실현을 표방하는 학부제는 교육현장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학문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설훈 민주당 의원이 지난 국정감사과정에서 내놓은 자료에서 확인된 것처럼 학부제는 당초 목표였던 학생들의 전공선택권도 보장하지 못한 채 심각한 학문편식만 낳아 학문구조의 파괴로 이어졌다. 거리시위까지 펼친 교수들의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강행된 두뇌한국(BK)21 사업의 부작용도 서서히 전면화되고 있다. 우수 논문의 발표가 늘고 있다는 교육부의 긍정적 해석 뒤로, 지방대 대학원들이 줄줄이 학생정원 미달사태를 맞으며, 연쇄도산의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김정숙 한나라당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32%의 교수조차 ‘대학원 중심대학 육성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고, 47% 교수는 ‘우수 학생 유치와 교육의 질 개선에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결과적으로 교수들은 이 사업이 대학간 역할분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 부추긴다고 진단하고 있다. 정책의 위기, 이것이 대학이 맞고 있는 첫 번째 위기이다.
정책과 행정의 위기는 결국 대학과 학문에 대한 정책당국의 철학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된다. 경제원리로 대학과 학문을 재단하고 인재를 이윤 창출의 수단인 ‘인적자원’으로 몰아세우는 척박한 교육철학이 빚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교육부가 내놓은 저 많은 페이퍼를 메우고 있는 말은 바로 ‘경쟁력’이다. 이점에서 위기는 교육철학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위기는 반복되고 있다. 아니 더 심화되고 있다. 교육부 관료들이 이름뿐인 기초학문 육성과 지방대 위기 극복을 내걸고 내년도 교육예산을 짜며 주판을 튕기고 있던 지난 24일, 지역소재 대학 총장들은 지역위기 극복을 외치며 ‘지방대 육성 특별법’을 싸들고 국회에서 직접 국회의원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고 있었다. 정치권이 진흙탕 싸움을 계속하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내팽개치고 있던 지난 15일, 덕성여대 교수·학생·직원 1백여명은 늑장을 부리는 교육부의 최후 판단을 기다리다 못해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비리 법인을 퇴진시키고 정상화의 단초를 세웠던 경인여대 교수들은 지난 19일, 오히려 법원으로부터 학생들을 선동하고 불법으로 학내분규를 일으켜 학사업무를 방해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나
이쯤이면 조금씩 뜻과 입장을 달리해온 7개 교수단체가 ‘위기’를 한 목소리로 외친 이유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원칙없는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정치놀음에만 급급한 정치권에 대한 비난이며, 대학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는 법의 무지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 있다. 당일 한 대학 교수가 전해온 “이제 더 이상 번지수 잘못 찾는 ‘개혁’의 구호는 대학에 통용돼선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개혁하자는 말인가. 개혁의 대상은 대학 위에 군림해온 교육부이며, 대학의 위기를 방치하는 정치권이며, 현실을 모르는 법”이란 질타는 분명 흘려들을 말이 아니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