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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식민지 시기 ‘조선의 기업가’
[역사비평 기획시리즈]식민지 시기 ‘조선의 기업가’
  • 교수신문
  • 승인 2007.07.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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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기 경제 상황에서 자본가, 기업가의 행위를 살피는 것은 ‘민족자본’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하는지를 살피는 척도가 된다.
오미일은 통계를 통한 경제 분석은 관점에 따라 선택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식민지 시기 경제적 관계는 경제논리만 아니라 정치논리로 좌우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류승렬은 일제의 자본 활동 개입에 대한 단면적 파악을 벗어나 전시기·전분야를 아우르는 종합적 검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민족’의 역할을 하지 못한 “민족자본”을 비판하고 있다.

#1. 수입대체품 필요했던 1910년대 후반 ‘기업 설립’ 활발

경성방직
식민지시기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가장 논쟁적인 화두를 던졌던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이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장점은 경제학적 분석기법을 이용하여 경제학자가 아닌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방대한 통계자료의 구축이다.
그러나 그 장점을 인정한 허수열 교수조차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제시하는 통계는 신뢰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필자 역시 그 자료와 통계수치들을 일일이 검토, 계산해보지는 않았으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제시하는 통계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제시하는 통계자료에 대해서라기보다 통계분석방법 자체에 대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국 총리 디스레일리(Disraeli, 1804~1881)는 거짓말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거짓말(lies), 환장할 거짓말(damn lies) 그리고 통계(statistic)라고 했다. MIT대 교수 폴 크루그먼은 <Peddling Prosperity>에서 경제학자 혹은 경제학자 출신의 정치가(선동가)들이 자신의 설을 입증하기보다 자신의 설을 지지하기 위해 통계분석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영리한 선동가는 경제성장에 관해 자기의 입장을 강화할 데이터를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고 하며 정치적 윤색이 가해진 “통계의 속임수”를 경계했다.

조선인 기업·기업가 연구 부족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통계분석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경제성장’을 구명하는 데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조선인 기업이나 기업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수적이다. 그리고 그 연구도 대개 경성방직과 같은 ‘성장’의 성공 사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인 기업가들은 자본축적 토대와 경로, 그리고 사회정치적 배경 등에 따라 대개 몇 가지 유형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첫째 직포·금은세공·도자기·韓紙 제조 등 재래업종에 종사한 수공업자이거나, 혹은 공업전습소 및 공업학교 출신의 기술자로서 소규모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근대 기업가로 성장한 유형이다. 東洋染織株式會社를 설립한 金德昌, 금은세공업자로 信行商會와 화신백화점을 설립한 申泰和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둘째 개별적인 자본축적 규모에는 상당한 편차가 있으나 객주·선상 혹은 기타 소상인 출신으로서 주로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기업가로 전환한 유형이다. 그 전형적인 보기로는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의 朴承稷을 들 수 있다.
셋째 공인 및 시전상인이나 差人으로서 官府의 물자 조달 및 수세 청부를 통해, 혹은 관료 출신인데 퇴직하여 종전 官府와의 연고관계에 의해 정부용달업을 통해 축적한 자본을 기초로 근대 기업의 설립, 경영에 나선 유형이다. 내장원 검세관 출신으로 상업 활동과 토지 겸병을 통해 전북 대지주로 성장한 白南信·白寅基 父子, 그리고 무관 퇴직 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입신한 한상룡과 조진태·백완혁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고위 관료 출신으로서 주로 권력을 배경으로 한 토지집적을 통해 자본을  축적, 기업 설립에 투자한 유형이다. 한일은행(동일은행)과 조선견직주식회사를 경영했던 민영휘 일가를 들 수 있다. 
기업가의 유형을 지역별로 보면 경제의 중심지이자 중앙 행정관부의 소재지인 서울에서는 셋째와 넷째 유형 기업가들의 비중이 컸다. 지방의 경우 첫째와 두 번째 유형 기업가들이 많았다. 

대지주·군장교·대상인 등 주도층 국한
대한제국 시기에 기업 설립과 경영을 주도한 것은 관제개정으로 퇴직한 관료 출신 대지주와 군대 장교들, 그리고 대상인들이었다. 그리고 기업 설립현상은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평양, 일부 개항장 도시에 국한되어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기업 중에는 봉건적 관행에 기초한 구문 징수를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도 있었지만, 혹은 식산흥업운동 차원에서 설립된 근대적 기업도 있었다. 1908년 이승훈 등 서북지방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 시기에 설립된 대부분의 기업은 자본과 기술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제국의 붕괴로 인한 국가적 지원정책의 결여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회사령으로 대표되는 총독부의 반기업정책은 후진국 기업의 성장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국가적 차원의 보호관세나 기업보조금과 같은 정책의 결여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조선인들의 기업설립운동이 다시 활발해지는 것은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이때 기업이나 공장 설립이 활발했던 배경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지만, 개항 이래 쌀 및 주요 산품의 상품화와 수출로 인해 자본이 축적되고, 그리고 문화계몽운동 이후 근대적 학교 설립으로 경제지식이 보급되고 공업 기술이 배양되었던 경제적 사회적 환경변화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 설립의 물꼬를 트게 한 것은 무엇보다 1차 대전 시기 수입품과 이입품의 가격 등귀로 수입대체품에 대한 경제적 요구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종래 고급관료 출신이나 시전상인에 국한되었던 기업설립 주도층이 확대되어, 서울·평양과 같은 주요 도시지역의 수공업자와 기술자 그리고 지방의 대지주들까지도 기업을 설립하는 예가 많이 나타났다.
먼저 수공업자에서 기업가로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신태화로 그는 은방에서 7년간 직공으로 일하다가 풀무 하나를 사서 자영하여, 1908년에 이르러 유력 실업가에게서 동업 형태로 자본을 빌려 공장을 갖춘 신행상회를 설립했다. 이 상회가 5배 이상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것은 1916년 무렵이었다.
한편 동경고등공업학교 방직과를 졸업한 崔奎翼과 같은 근대적 기술자들이 기업체를 설립하는 것도 대개 이 무렵에 이르러서였다. 1899년 대한제국의 상공학교(1904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 설립을 필두로 務學校, 한성직조학교, 철도학교 등의 기술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술자가 배출되었다. 그런데 졸업 후 이들이 취직할 기업이나 공장은 마땅치 않았고 또한 자영할 자본도 없었으니, 결국 하급 관직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공장을 설립하거나 기업 경영에 참가하여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 바로 1910년대 중후반 이후였다. 즉 최규익은 1900년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후 醫學校 교관이나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1914년 10월 한양염직소를 설립했으며, 이후 1920년에 김덕창 등과 함께 동양염직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삼남지방 지주들 경성방직 차려
또한 지역의 지주들이 토지 경영에서 벗어나 투자전환을 꾀하여 기업을 설립하려고 나섰던 시기도 대개 1910년대 후반 이후부터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1919년 삼남지방 지주 190여 명의 자본을 규합하여 설립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들 수 있다. 
“제국의 후예”로 성공한 경성방직에 대해서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시각에서 많은 연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제국의 후예”로 성장하지 못한 기업도 있었다. 1929년 경제난에 빠져 있던 중외일보사를 인수하여 경영한 안희제는 원래 의령 출신의 중소지주로서, 그는 1915년 이후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토착객주의 도움을 받아 경영하다가 1919년 경남지역 지주 31명의 투자로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19년에는 조선주조주식회사(자본금 10만원)를 설립하기도 했다. 조선국권회복단과 협동조합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좌파였던 그는 결국 1933년 만주로 이주했다. 경영능력상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일제 산업경제정책에 순응하지 못했던 그의 기업은 식민지하 ‘민족기업’의 궁극적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적 관계는 경제논리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비경제적 논리, 특히 정치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 않은가! 기업의 성쇠와 향배에 있어 중요한 변수인 산업·금융정책은 각 계층 및 계급 사이의, 그리고 식민지시기에는 민족 간 정치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통계분석으로 가격변화와 시장동향을 읽고 경제주기까지는 말할 수는 있으나, 그것만으로 정치사회적 관계(넓게는 역사적 사실)까지 언급한다면, 그것이 바로 디스레일리가 말한 ‘거짓말’일  것이다.

오미일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말~1920년대 조선인 자본가층의 형성 및 분화와 경제적 지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근대자본가 연구> 등이 있다.

 

#2. ‘민족자본론’ 성과 토대로 한 ‘국민기업론’ 확산돼야

동아일보
애초 부여된 ‘식민지시기 조선인 기업가’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일제강점기 민족 자본가’라는 논쟁적 표현보다는 상당히 완화된 느낌을 준다. 오늘의 한국인과는 차별화되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 구분을 설정하고 자본가보다는 포괄적인 기업가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수긍할 수 있다.
다만 필자는 제국주의 지배 권력의 예속과 억압에 의한 경제외적 폭력의 개입과 자본 활동의 명백한 제약을 드러내기 위해 ‘일제강점기’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가 연구는 대개 조기준의 성과로부터 시작한다. 조기준은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인 1973년 <한국기업가사>와 <한국자본주의성립사론>이라는 독보적인 업적을 내놓았다. 조선인 기업가를 모두 민족 범주로 포괄하면서 한국 자본주의 성립사를 체계화하려는 시도는 충분한 명분과 의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본격화한 우리 사회의 민중·민주 운동의 전개 및 반민족·친일 행위에 대한 사실 확인과 인식의 심화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성과 적용을 요구받아 왔다.
이러한 과업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필자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선학들이 발굴한 구체 사실을 더욱 심화·확대함과 아울러 그들이 제시한 담론의 내용과 형식을 체계적·구조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도약의 발판을 만들어보자고 다짐한다.
근래 경제사 방면의 연구가 주춤해지는 추세 속에서 훌륭한 성과가 제출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오미일, 이승렬) 특히 연구 내용 면에서 많은 사실들을 새로이 발굴하면서 실증적인 작업을 폭넓게 수행한 것은 크게 돋보인다.
더욱이 자본의 순환 및 재생산과 민족 운동론을 결합시켜 체계적인 이해를 도모한다든가, 1930년대 이후의 조선인 기업가의 거취를 인식 및 논리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본격화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민족’ 담론의 도입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가 연구의 초점은 늘 ‘민족’ 담론을 둘러싼 문제였다.
먼저 민족 범주를 도입하려는 경우, 단순 명목 사용론과 실질 규정론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순 명목 도입론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본질상의 차이는 없다. 하나는 조선인 소유의 기업=민족 기업, 조선인 자본가=민족 자본가로 보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성질을 갖는 민족 자본·민족 자본가 개념은 식민지 경제 현실을 왜곡시킬 수 있으므로 조선인 자본·조선인 자본가라고 하여 민족별 차이만 표시하면서 내용상으로 민족적 차별성을 실증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다.
둘째, 실질 규정론은 민족 범주를 도입하여 민족 해방 운동의 전개와 시대 성격 규정에까지 적용하자는 것이다. 민족 자본·민족 자본가의 개념은 다시 조선인 자본·조선인 자본가의 실태와 재생산 구조에 대한 파악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족 해방 운동과의 연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조선인 자본가들이 민족 통일 전선 운동에 자신들의 이해를 일치시키고 역할을 부여받을 수 있는 틀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나아가 새로운 국가 건설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본의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민족 구분이나 민족 자본·민족 자본가 등과 같은 개념 도입 자체를 원천 부정하는 경우인데, 식민지 자본주의론과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주장이 해당한다. 특히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민족별 차이조차 드러내서는 안 되며 조선이라는 지역 구분만 상정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조선이라는 지역 대신 그 속에 살고 있던 조선인을 중심으로 하는 식민지시대 경제사 연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라.”(허수열)는 충고, 그리고 조선인 기업가 연구에서 “공동체적 이익, 민족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한 존재”(주익종)를 주목했던 초심만을 환기해두고자 한다.

‘민족 자본가론’의 역사 담론화
감상적 접근을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민족 자본가론’은 주로 민족 해방 운동 및 민족 통일 전선 운동상의 배치, 신국가 수립상의 위상 부여 등과 관련되어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담론의 전환이 필요하다. 역사 연구의 시각과 방법을 본격 도입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경우 두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자본 순환과 기업 경영의 예속성에 대한 사실·실증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자본가’ 담론의 전개와 귀결에 대한 총괄이다.
양자는 사실과 가치, 현실과 전망, 역사적 사실과 역사 담론의 양면을 가리킴과 아울러 변증법적 상호 작용의 카운터파트를 뜻한다.
일제강점기 재생산 구조의 예속성과 역사적 성격에 대한 파악은 시기·분야 등에서 분산적·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왔으나, 이제 전 시기·전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적 검토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에는 1930년대 이후 예속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민족적 독자성의 여지가 협애화·형해화되는 사정을 비롯하여 민족 경제론, 토착 경제론 등으로 표현된 자립적 민족 경제 체제 수립 구상의 내용과 의미를 드러내는 일도 포함된다.
‘민족 자본가’ 담론의 전개와 귀결에 대한 체계화는 단순히 ‘민족자본’의 내용과 성격 규정의 변화나 현재의 개념적 적실성 정도를 넘어 하나의 역사적 담론으로서의 변천과 당해 시대사 이해에서 점하는 의미, 그리고 연구사상의 기여 등을 짚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가에 대한 파악과 관련하여 ‘민족 자본가’론에 대한 역사적 접근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1930년대 중국이나 조선의 현실을 되살리면서 민족 자본론의 적합성과 효용성을 곧바로 논하기보다는 담론 전개 과정 전반을 포괄하면서 그에 응축된 논자들의 고민과 구상 및 서로 부딪친 논점의 핵심을 추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진전된 연구를 위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은 꼭 상기하고 싶다.
첫째, 근대주의의 함정인 승자 위주 성장사관에 매몰되어 예속과 친일의 대가이기도 한 극소수 조선인 대자본가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특정 시점이 아닌 일제강점기 전반을 시야에 넣으면서 몰락해간 숱한 조선인 기업가의 궤적을 최대한 발굴해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둘째, ‘민족’ 범주의 기계적 적용에 따른 단선적 논의를 벗어나야 한다. 일제강점기 예속과 차별 속에서 취약한 자본으로 냉혹한 경쟁 상황에 처했던 모든 조선인 기업과 기업가들이 몰락을 면하고 잔존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하나는 예속과 친일의 수용·감내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민중의 희생을 무릅쓴 관심과 애정이었다. 어느 면으로 생각하든 ‘민족’ 범주는 역사적·민족적 부채 의식에 따른 자기 헌신을 깨우치는 징표인 것이다.

승자 위주 성장 담론의 극복과 국민 기업론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을 포함한 당대의 경제적 성취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것일 수 없다. 폭력과 차별이 일상화된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오늘에까지 번성한 자칭 ‘민족 자본가’들은, ‘민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민중들에게 비싸고 거칠더라도 ‘우리 것’을 ‘사라’고 외치는 대신 자기 헌신과 사회적·민족적 기여를 토대로 한 민중적 신뢰 획득과 역사적·도덕적 헤게모니의 구축에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근대적 조선인 대자본의 핵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해방 후 한민당을 결성하기에까지 이르렀던 동아일보·경성방직 계열의 경우 1930년대 이후 과연 민족 자본가에 걸맞은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필자는 이제 ‘민족 자본’론의 성과를 토대로 한 ‘국민 기업’론의 구성과 확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예속과 친일의 오욕으로 얼룩진 과거를 ‘민족’이란 칭호로 붙여 호도하려는 기도를 원천 배제하면서, 그들이 자기 헌신과 사회적·민족적 기여를 저버린 데 대한 역사적·도덕적 속죄를 촉구하는 역사 담론의 성격을 가질 것이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많은 사실들이 치우침 없이 파헤쳐지고 국민 국가의 수립·발전과 관련한 다양한 담론들이 활발히 소통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기업측에는 국민을 향한 신뢰 구축과 역사적·도덕적 재무장의 기회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작업이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동질감을 굳건히 해나가는 밑바탕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류승렬 / 강원대·역사교육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말·일제초기 상업변동과 객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 ‘한말 대외교역의 확대에 따른 현안 인식과 타개방안의 모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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