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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맑스 경제학 다시 읽기
[책들의 풍경] 맑스 경제학 다시 읽기
  • 교수신문
  • 승인 2001.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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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3:24:18
『자본론의 세계』(강신준 지음, 풀빛 刊), 『새정치경제학』(김형기 지음, 한울 刊)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마르크스의 비유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의 편을 들었던 대가로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자다. 그러니 헤라클레스가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끔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인 마르크스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 4월 부평에서 저질러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권력의 야만은 대표적 계기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율은 늘어만 가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언제나 퇴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고, 몇 년째 취직난은 계속되고 있다.

어민, 농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은가. 신자유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명확한 만큼, 한낱 유행으로 지나간 ‘마르크스의 포박’이란 상징이 다시 주의 깊게 관심을 끌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다.

변화를 위한 ‘자본’의 과학성

한낱 유행처럼 마르크스가 읽혔다는 평가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는 강조되었으되 그 구조에 기반하는 제도라든가 주체의 문제는 적극적으로 해명되지 않았다. 제도는 구조의 모순에 비해 부차적인 것일 따름이었고, 깨어있는 주체란 그 모순을 타파할 당위성 정도에서만 고려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너무나 많은 부분까지도 마르크스에게 기대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흘러가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엥겔스가 요제프 블로흐에게 보냈던 몇 통의 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치 십 몇 년 전 우리의 상황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비판하는 듯한 대목이 많다. 그 중 한 부분. “경제적 상황이 그 토대이지만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 역시 역사적 투쟁의 과정에 그 영향을 미치고 여러 경우에서 특정한 그 형태를 결정한다. 이 모든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 끝없는 일련의 우연들 한가운데서 경제적 운동은 마침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어느 시기에 이론을 적용하는 일은 간단한 일차방정식을 푸는 일보다 더 쉬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면, ‘자본론의 세계’와 ‘새정치경제학’의 특징은 한 눈에 드러난다.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의 ‘자본론의 세계’는 7년 전 펴낸 ‘자본의 이해’를 전면적으로 개편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책이 ‘자본’의 해설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결국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 분석에 머무르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나라에서 맑스경제학이 갖는 현실성”에 대한 필자의 믿음 위에 구축된 것이므로 굳이 한계라고 지적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애초의 의도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 있었고, 그러한 의도가 제대로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론의 세계’의 장점이라면 ‘자본’의 과학성, “특히 ‘변화’를 위한 객관적인 과학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불어닥치면서 펼쳐진 구체적 현상을 통해 이론이 전개되기에 가능해졌다. 이해하기 쉽게 다가오는 까닭도 여기서 비롯된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이 책의 9장과 10장. 산업자본과 화폐자본 간의 대립을 설명하기 위해 잉여가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최근 신자유주의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김형기 경북대 교수(경제학)가 쓴 ‘새정치경제학’에 붙은 ‘새’라는 접두사는 허사(虛辭)가 아니다. 김교수는 경제학의 3대 학파인 신고전파 경제학, 케인즈 경제학, 마르크스 경제학을 통해서는 현재의 자본주의 모순을 넘어설 단초 마련이 어렵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택한 방식이 정치경제학의 기본바탕은 유지하되 조절이론의 시각을 도입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 생산관계와 제도와 주체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를 해명하겠다는 것이 김교수의 의도인 셈이다. 그러한 의도가 도달하는 입장이 어떠한 새로운 입장을 빚어내는가는 다음과 같은 부분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시대 특정 국가의 자본주의는 특정한 조절양식에 의해 매개되는 특정의 축적체제로 그 성격이 파악될 수 있다.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의 존재형태를 조절이론에서는 발전모델(development model) 혹은 발전양식(model of development)이라 부른다. 발전모델이 다르면 자본주의의 성격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시간적 가변성과 공간적 다변성은 발전모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결국 6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새정치경제학’의 내용은 자본주의에서의 발전모델의 교체 과정을 해명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을 드러내면서도 지식기반경제체제(know-based economy)로의 변화가 갖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밝혀 놓는 대목을 보노라면 그 장점이 두드러진다. 『자본론의 세계』의 한 장이 ‘공황’에 대해 할애된 반면, 『새정치경제학』에서는 그 부분을 ‘구조적 위기론’의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도 있다. ‘발전모델’의 설정이 정통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어느 정도까지 유연화시킬 수 있는가를 드러내는 상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교수의 견해가 새로운 만큼 많은 관심을 불러모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절이론 도입, 맑스주의 외연 넓혀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문득, 프로메테우스가 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코카서스 바위에 묶인 마르크스 역시 똑같은 처지가 아닐까. 대부분의 예언자는 흔히 장님으로 이해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와 거기에서 빚어지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상징인 것이다. 물론, 프로메테우스는 신이었기에 굳이 장님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좀 다르지 않을까. 저 타락한 사회가 나를 옥죄어 오지만, 그와 맞서는 장소로 곧장 나아가기보다는 그 분노를 객관화시키는 여유가 필요할 성싶다. 그 여유가 우리를 헤라클레스로 만들 것이다.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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