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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故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제 28주기 추모제 풍경
[추모] 故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제 28주기 추모제 풍경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1.10.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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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0:43:02

2001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서울대 근대법학교육 100주년 기념관에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1973년 10월,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자진 출두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 받다 숨진 故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의 28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이날은 마침 대통령직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한 지 1주년 되는 날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밝힌 사인은 “간첩임을 시인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중앙정보부 건물 10층 화장실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것. 그 시절 모든 죽음이 그러했듯이 의혹과 기막힘의 만장에 덮인 채 서둘러 묻혔고, 중정의 감시 아래 가족들은 시신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최종길 교수 전기고문 사망설’을 제기하면서 의혹의 응어리를 처음 터뜨린 이래 수십 년 동안 유족들은 유가협 등 인권단체들과 함께 진상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최종길 교수의 제자인 이은영 한국외대 법대 학장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암흑의 시대, 공포의 시대를 살았던 우리 모두의 사건이자 아픔”이라는 말로 추모사를 이어갔다. 그의 말처럼 개인의 죽음이 유독 개인적이지 않은 우리 역사에서, 최종길 교수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도저히 간첩일 수 없는’ 그의 인품과, 한국법학 근대화에 젊음을 바친 법학자 최종길의 열정이었다. 1962년부터 강단에 선 그가 10년 동안 남긴 논문만 50여 편. 유럽과 미국을 돌며 오랜 유학생활과 교환교수생활을 하면서도 조국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괴로워한 그를 ‘유신반대’라는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간 것은 다름 아닌 학자로서의 양심, 그것이었다.

당시 10살이던 어린 아들은 지금 8살 짜리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어 그 역시 법대 교수의 길을 걷고 있다. 최광준 경희대 법대 교수는 추모식에 모인 이들에게 “아버님 외에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내 아버지, 내 자식, 내 형제로 생각해주기를” 당부하고, “맨 마지막에 눈물을 거두는 유가족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램처럼, 더 이상 시대가 죽음을 부르지 않고 죽음이 욕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은 아직도 너무 많다. 오는 11월 중 故 최종길 교수 추모문집이 선보일 예정이다. 추모문집에는 최종길 교수의 동료, 선·후배와 제자 등 각계 인사들의 글과 인터뷰 등이 실린다. 최교수의 아흔 여섯의 노모와 남은 아내, 칠순 누이들의 삶은 73년 ‘그날’에 정지되어, 오직 ‘사인규명’만을 바라며 남은 생을 살아오고 있다. 그들은 멈춰버린 생의 시계가 다시 돌아갈 그 날을 기다린다. (故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www.humankorea.or.kr)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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