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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세력’ 강조, ‘한말의병’ 과소평가 하지 않았나
‘고종세력’ 강조, ‘한말의병’ 과소평가 하지 않았나
  • 교수신문
  • 승인 2007.07.0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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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고종황제와 한말 의병> 오영섭 지음 | 선인 | 2007

한말 의병사 연구에서 저자의 위치는 특별하다. 그의 공부는 의병 봉기의 자발적 측면을 강조하던 박은식 이래의 연구 경향에 의문을 던지는 동시에, 뒤바보의 연구시각을 이어 ‘평민의병장’의 등장을 내세우면서 의병운동의 질적인 전환을 강조하는 민중주의적 관점에 비판의 칼을 들이대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학계 바깥에서 ‘문중사학’과 충돌하고, 학계 안에서도 비교적 인색한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시종일관 한말의 중앙 정치무대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과 의병활동 사이의 연관을 추적하여 왔다. 이 과정에 그가 구사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은 그 목록만으로도 이 분야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될 정도이다. 그리고 그가 있었기에 의병 측 자료와 일제가 작성한 ‘진압’에 관한 자료를 중심으로 소박하게 전개되어 온 의병사 연구는 비로소 당당한 정치사적 맥락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종세력의 구체적 실체 추적 성과
11편의 논문을 모아 놓은 <고종황제와 한말의병>에서도 저자의 관점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한말의병이 중앙세력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고, 고종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의 정치세력이 주동적이었음을 지나치리만큼 반복하여 강조했다. 그는 한말의 의병운동을 ‘고종세력과 재야세력이 외세구축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굳게 뭉쳐 조직적으로 전개한 항일민족운동’(22쪽)으로 정의하고, 고종으로부터 전달된 ‘밀지’가 결정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다고 보며, 의병운동이 종식될 때까지 이러한 기본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지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는 주요 의병장들의 봉기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고종시대의 부산물인 ‘별입시(別入侍)’나 민 씨 척족세력 등 고종세력의 구체적 실체와 동향을 추적하여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이러한 그의 새로운 시각과 구체적인 성과는 매우 유익하며 의병운동에 대한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도 국난이 닥칠 때마다 국왕은 측근들을 통하여 재야의 유생들에게 봉기를 독려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국왕과 국가의 공식 기구가 외세에 장악되다시피 했던 한말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국왕 측근의 비공식적 라인이 의병운동에 일정한 구실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연구가 진척되면 이와 관련한 더 많은 구체적 사례들이 드러날 것으로 짐작한다. 과거에 저자가 ‘근왕세력’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고종세력’으로 정리한 것도 논지를 명백히 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간다.
그러나 ‘고종세력’이 전달했다는 ‘밀지’의 규정성을 강조하다 보니 모든 의병부대의 봉기가 밀지의 종속변수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조선시대 유교적 통치체제의 연장에서 의병봉기를 이해해야 한다면서도, 정작 조선왕조의 체제를 국왕에 대한 조건 없는 복종만을 강조하던 사회였던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아닌지.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충효사상’, ‘충애사상’, ‘유교사상’, ‘충군애국론’, ‘유교적 심성’의 실체는 모호하기만 하다. 국가가 위태로울 때에 몸 바쳐 헌신하는 것은 조선의 선비들이 신념처럼 내세웠던 부분이요, 그들은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는 ‘원칙에 대한 충성’을 더 앞세우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유인석의 ‘처변삼사(處變三事)’에서 보듯이 국가보다 중화문화의 수호에 치중하고, 문화적 위기 상황에서 봉기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겼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한말의병은 저자가 정의했듯이 고종세력과 재야세력의 연대 속에서만 가능했을까? 미심쩍은 밀지가 혹시 ‘문중사학’에서 윤색되고 과장되는 부분은 없었던가.
저자가 의지한 다수의 쓸 만한 자료들은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의해 작성된 자료들이다. 이들 자료에서 우리는 객관화된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의병봉기’라는 지극히 조선적인 역사현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이 이 현상을 의도적으로 ‘이해관계’에 따라 설명하고자 했던 점도 참작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의병사에 나타나는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이들을 너무 쉽게 ‘별입시’일 것으로 추측하고, 단정하는 것은 아닌지. 고종세력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의병으로 간주했던 민용호 의병을 다시 ‘대원군 계열’로 이해하고, 그것 때문에 고종세력의 후원을 받은 유인석 의병과 대립하였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것은 아닐까.
후기의 병기에 나타난 수많은 소규모 의병들이 ‘화적(火賊)적 성격’을 가졌다 하여, 논의에서 제외한 것도 문제이다. 밀지를 전달받아 권위를 행사한 의병장이 통제하는 의병부대만 의병이란 말인가. 일제의 판결문에 나타나는 표현처럼 그들을 화적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의병이 ‘토벌’되는 과정에서 부대의 규모가 작아지고 항일 활동보다 농민에 대한 ‘토색’활동이  두드러지는 고통스러운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저자 또한 이를 ‘의병운동 해체과정 내지는 독립군으로 전환과정에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44쪽). 그런데도 이들을 의병운동의 분석에서 제외한 것은 용납될 수 있을까.

평민층의 의병참여 이유 논란의 여지
결국, 20년 가까운 기간에 진행된 의병운동을 국왕 중심으로 짜인 조선사회의 제반 질서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고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해당 시기는 한국 사회가 세계체제로 재편되어 나가는 격동의 시기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한국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정보의 종류와 양에는 또 얼마나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가. 후기의병시대에 이르면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신문이 다량 유통되어 국내외 정세, 또는 의병에 대한 정보를 쏟아 내고 있었다.
평민층의 의병참여에 대한 저자의 주장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의병운동을 고종세력의 ‘구국의지’가 재야세력의 ‘생존권 확보를 우선시하는 반침략 의식’과 결합한 것으로(76쪽), 병사층인 포군과 해산군인들은 시급한 생계비를 벌기 위한 ‘생존투쟁’(50쪽) 차원에서 동참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포섭과정과 의병운동 진행과정을 나누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집 초기에는 용병적 성격이 있었다 하여도, 부대 편성 과정에서 엄격한 ‘군율’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았던가. 의병 속에서 민중을 강조하였던 뒤바보조차 ‘피동이 많았다’고 인정하였다.
의병장과 함께 거친 산야를 달리던 의병들은 제대로 된 보급도 없이 굶주리기도 했고, 더러는 투쟁의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평민 출신의 의병들이 몸으로 겪었을 역사 현실, 그리고 의식의 성장은 무의미한 것일까. 저자의 표현처럼 의병장이나 척사·혁신 유림 및 해산군관들(해산군인이 아닌)의 충군애국론만이 한말의병의 순국정신이라고(51쪽) 단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지역적, 개별연구를 넘어서는 의병사 전체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리고 고종세력을 설정하여 책 제목에서 보듯이 ‘고종황제’를 ‘한말의병’과 거의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데 상당 부분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말의병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크게 넓힌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고종세력이라는 변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한말의병의 지역적·시기적 다양성과 발전 양태를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평가는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나가는 개척적 연구자들이 흔히 겪는 산통 같은 것이지만 저자의 학문적 대성을 위해서라도 극복해야 할 과제라 여겨진다. 끝으로 불평을 하나만 덧붙이자면, 자신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부분에 대한 안내를 덧붙이지 않은 점, 매우 불편했다.

구완회 / 세명대·한국사



필자는 경북대에서 ‘조선후기의 수령제운영과 군현지배의 성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말의 제천의병> <제천의병의 종합적이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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