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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경제적 가치 얕볼 수 없다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 얕볼 수 없다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0.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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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30 10:55:16
최근의 인문학을 둘러싼 각종 행사를 들여다보면 약간은 맥빠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어디서건 인문학의 위기는 반드시 거론되는 단골메뉴로 자리잡았다.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므로 기력조차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인문학이 배척 당하는 현실을 문제삼건 자기반성 속에서 비관주의로 빠지건, 그 태도에서 강한 의지를 읽어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를 타진하려는 목소리는 어떤 것인지, 과연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의 행사가 될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내재적 가치 적극 옹호

지난 19일부터 이틀동안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와 생산성’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약 1백여 명의 참여 속에서 열렸다.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회장 권기호 경북대 교수)와 인문사회연구회(이사장 김영진) 주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전택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경제학)가 발표한 ‘지식정보시대에서의 사회생산함수와 인문학의 새로운 역할‘이라는 논문이 유독 주목을 끌었다. 주제 자체가 생소한데다 다소 이질적인 목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문학을 경제학적 분석대상으로 삼으며 논지를 펼친다. 먼저 인문학은 동서를 아울러 바람직한 인간상을 만드는 역할을 갖지만, 새롭게 펼쳐진 환경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는 기존의 경제학 또는 경제학적 가치를 문제삼는다. 손에 잡히는 것만 경제학적 대상으로 삼고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외면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나 공헌도는 애초부터 부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평가받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결론이 가능해진다. “사회생산함수의 신축적 해석은 인문학의 사회적 공헌도를 명시적으로 표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김성기 충북대 교수(경제학)와 박관석 목포대 교수(경제학)는 각기 “자본주의적 폭력인 물신성에 인문학이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의 고유한 특성에 기초하여 인문학의 활로를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인문학이 나름대로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주장은 눈에 보이는 효용성만을 따지는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석희 인문사회연구회 사무국장은 ‘인문학과 국가 경쟁력’이라는 논문에서, 인문학이 “국가경쟁력이라는 피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대세 앞에서 인문학적 방법과 상상력으로 깊이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문학과 국가경쟁력이 모종의 함수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는 그것이 국가경쟁력에 대한 강박관념은 아닌지 물으며, 인문학에 대한 지원 자체보다 어떤 지원이냐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전문연구자가 아닌 인문학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지원대상이 돼야 한다. 인문학의 속성은 제도와 프로젝트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스르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인문교육의 위기

이번 행사의 종합토론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국사학)의 사회로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종합토론은 모든 참석자에게 자격이 주어졌다.

약 20여 명의 토론자들이 저마다 의견을 달리하는 가운데서도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자의 위기 또는 인문교육의 위기라는 의견들이 그것이다. 토론의 초점은 대체로 인문학의 경제적 효용성, 인문학에 대한 정부 지원보다는 인문학자들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맞춰졌다. 특히 박순준 동의대 교수(사학)는 “위기는 늘 상존해왔으며 유난히 인문학의 위기가 강조되는 것은 (인문학자들이) 안주해왔기 때문”이라며 교육방법론의 변화와 인문학 소비자와의 다각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문학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다. 더 나아가 이상규 경북대 교수(국문학)는 피드백의 문제를 지적하며 학문후속세대의 적체현상에 따른 공동화 가능성을 우려했다. 요컨대 인문학 교수들이 위기 진단의 폭을 넓게 가져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회개혁과 발맞춰야

한편 이번 행사 중 신임회장으로 선출된 유초하 충북대 교수(철학)는 이번 학술대회가 정부정책과 지원에 크게 반영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책 효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단지 매년 열리는 학술대회를 통해서, 공동으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말했다. 앞으로 협의회의 주된 활동과 방향을 묻자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필요하다는 것을 줄곧 주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개혁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며, 사회개혁과 동시적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진지한 자세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하여 고민하는 교수들의 모습이야말로 이번 행사의 의의임에 분명하다. 그것이 자생적 인문학을 모색하는 중추임에 분명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집단적 힘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이번 행사에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논박이 오가는 토론의 뜨거움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별 의견들은 그 고유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공허한 혼잣말로 들린다. 이럴 때 위기 극복은 국소적인 집단 내부에서 떠도는 현란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이 독백의 언어들을 대화의 그것으로 변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성찰이 넘치기를 기대한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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