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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열전’으로 부활한 비잔티움 1천년 역사
‘황제열전’으로 부활한 비잔티움 1천년 역사
  • 이승원 / 한양대·국어국문학
  • 승인 2007.06.25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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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비잔티움 연대기> 전 3권 |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음 |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라진 과거의 로마제국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일까. 한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던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영화 <벤허>(1959년)로부터 <칼리큘라>(1980년)를 거쳐 <글레디에이터>(2000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로마를 기억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영화를 통해서였다. 영웅, 이륜마차, 검투사, 사자, 폭군, 그리스도교, 노예, 채찍, 환락과 광기 등등이 내가 영화를 통해 로마를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이 기억 또한 ‘5현제 시대’가 막바지에 이른 기간까지의 로마였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이 ‘인류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라고 일컬었던 5현제 시대가 막을 내린 후,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함으로써 비잔티움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피의 화요일’ 그믐달이 뜨고 제국 사라졌다
유럽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기억)를 횡령했다. 1123년 18일 동안 다양한 혈통으로 이루어진88명의 황제를 배출했으며, 단일 제국으로는 최장수를 누렸던 비잔티움의 역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453년 5월 비잔티움은 불길한 징조로 뒤덮였다.
5월 22일에는 월식이 일어났고, 성모의 성상 받침대가 땅바닥으로 나뒹굴었고, 전대미문의 매서운 폭우가 쏟아졌다. 우박을 동반한 거센 빗줄기에 거리는 물바다로 변했으며, 5월 말의 날씨라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수도 전역에 깔렸다.
술탄 메메드 2세가 이끄는 25만 명의 오스만트루크 병사들과 맞서 싸울 비잔티움의 병사들은 약 만 명에 불과했다. 끝내 교회의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던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팔라이올로구스)는 비잔티움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은 네 가지가 있다. 신앙, 조국, 가족,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가장 취약한 성벽에서 전쟁을 진두지휘 했다. 45일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황제의 기장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그저 비잔티움의 평범한 한 사람의 자격으로 적진으로 몸을 날렸다. 이윽고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트루크에 함락되었다. 아직 새벽 무렵이었고 그믐달이 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는 온통 유혈이 낭자했다. 여자들은 강간당했으며 아이들은 꼬챙이에 찔려 죽었다. 성당은 잿더미가 되었고, 성상들은 불에 타버렸다. 제국 최고의 성상으로 성 루가가 직접 그렸다는 호데게트리아 성모상은 네 조각으로 찢겨 파손되고 말았다. 1453년 5월 29일 피의 화요일에 비잔티움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유럽의 역사에서도 망각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붕괴시킨 오스만트루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겨우 스물 한 살의 청년이었다.

‘로마제국의 쇠망사’ 정면 반박
비잔티움사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한동안 세계사의 주변부에 위치했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1200페이지(영어본)에 달하는 분량으로 복원했다. 그는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비잔티움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철저하게 타락한 저급한 제국”이라고 비난하였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중심 얼개는 서로마였으며 동로마는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18·19세기 역사가들은 유럽의 전통을 ‘서로마’에서 찾았다. 동양과 서양이 절충되어 있는 비잔티움은 근대 유럽 역사가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유럽의 역사가들은 동로마를 제외한 서로마의 역사 자체를 곧 유럽의 역사로 치환했고, 나아가 이 유럽문명의 역사 자체를 세계문명의 근원으로 치환해 갔던 것이다.
비잔티움은 전제 정치와 신권 정치의 중간에 해당하는 제국이었다. 서로 다른 혈통의 황제를 중심으로 피비린 싸움을 벌였던 성직자와 환관 그리고 황실 여인들의 정치적 암투는 비잔티움의 일상이었다. 또한 이 시기는 성상파괴 문제를 두고 종교적인 교리 해석의 문제가 치열했던 시대이기도 했으며, ‘십자군’이 일어났던 시대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비잔티움의 “황제들은 혼자서 잠을 자지 않았다.” 그만큼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황제는 암살의 공포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음모와 암투만이 비잔티움의 전부는 아니었다. 비잔티움은 헬레니즘 문화를 자양분으로 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가 융합되어 발전하였고, 서방과 동방의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던 곳이었다. 비잔티움 시대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법 대전’을 완성하였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건설되었다.
저자는 자신을 역사가가 아닌 이야기꾼이라고 강조하며 얽히고설킨 비잔티움 천년의 역사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해 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존심을 가진 역사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자신의 말로 표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자는 황제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서의 역사’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황제와 귀족의 영웅연대기 형식
<비잔티움 연대기>의 탄생으로 인해 서유럽 중심의 서양사는 비로소 하나의 통합된 서양사 기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오늘날의 유럽 문명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비잔티움이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유럽의 찬란한 문명과 문화는 비잔티움 제국이 동방의 ‘야만족’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는 그리스·로마의 위대한 문명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킨, 끝내 로마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던 비잔티움의 ‘순결한’ 역사가 장강의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비잔티움의 망각된 역사를 복원해 내는 것은 배제된 서양사의 일부를 복원하여 하나의 서양사를 기술하는 데 중요한 초석일 것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연대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지만 서로마 중심이건 비잔티움 중심이건 간에 ‘로마’를 ‘중심’으로 당대의 세계사가 구축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이 명명한 ‘야만족’들이 더 일찍 로마를 정벌했다고 해서 세계의 문명과 문화가 너절하고 초라해졌을 것인가. 동쪽의 이슬람, 북쪽의 슬라브족, 서쪽의 게르만족은 ‘로마’의 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의 엑스트라일 뿐인가. 이 책은 비잔티움을 ‘구원’하기 위해 또 다른 누군가를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화의 다양성을 모범’으로 삼았던 비잔티움의 전통을 ‘지금-여기’에서는 어떻게 변주할 수 있을까. 또한 이 책은 철저한 ‘황제 열전’으로서 황제와 귀족 중심의 영웅일대기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궁금하다. 황제와 귀족이 아닌, 비잔티움의 평범한 장삼이사들은 어떤 오밀조밀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었을까. 황제도, 영웅도, 성자도 아닌, 비잔티움의 평범한 사람들은 연인에게 어떻게 프러포즈 했을까.
그들의 일상적 수다는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의 일상적 놀이문화는 어떤 빛깔이었을까. 아직 <비잔티움 연대기>의 방대한 서사는 나의 이러한 ‘사소한’ 물음표를 향해 거대한 침묵으로 화답하고 있다.

이승원 / 한양대·국어국문학


필자는 인천대에서 ‘근대전환기 기행문에 나타난 세계인식의 변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조교수이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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