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7:25 (목)
우리 철학의 밑돌괴기 … “비판 통한 논쟁의 장으로”
우리 철학의 밑돌괴기 … “비판 통한 논쟁의 장으로”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7.06.18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제]<우리말 철학사전 1~5권> 완간 우리사상연구소 지음 | 지식산업사 | 2007

우리사상연구소(소장 이기상)가 펴내는 <우리말 철학사전>(지식산업사)이 5권을 끝으로 완간됐다. 아니, 다시 ‘시작’됐다.
2001년부터 올해까지 6년 동안 편찬된 <우리말 철학사전>은 ‘과학’, ‘존재’, ‘학문’과 같은 대개념 철학용어 60가지를 다루고 있다. 각 권별로 12가지 개념어를 풀어놨다. 우리사상연구소는 완간 이후로 하위분류의 중개념어와 소개념어 각 60개를 선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개념에 대한 원고는 200자 원고지 120매~150매이지만, 중개념 원고는 50여 매, 소개념 원고는 이보다 다소 적은 10여 매가 될 전망이다. 총 1백80개 내외 개념어 정리가 끝나면 가나다순으로 분류된 사전 꼴 형태로 편찬될 수도 있다.
우리사상연구소는 이어지는 사전편찬 작업을 한국철학회 등이 이어주길 바라고 있다. 편찬위원들은 학회 계간지에 정기적인 ‘우리말 철학사전’ 섹션이 생기거나, 사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받을 수 있는 큰 학술대회가 열리길 고대하고 있다. 사전 완간과 무관하게 우리말로 학문하는 작업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우리사상연구소는 사전편찬과 더불어 ‘우리말 학문하기 모임’을 끌어왔다. 지금은 폐간되었지만 2002년 7월 창간한 <사이>(지식산업사)라는 잡지 등이 연구결과물을 이어왔다. 현재 사전편찬위원회 참여자들은 ‘우리학문의 방법론’을 준비 중에 있다. 세계 보편적인 연구방법을 유지하면서도 한국 개별 특수성에 맞춘 현실적인 연구방법론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다. 사전편찬위원회 총무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철학, 사진)는 ‘우리말로 철학해야하는 이유’를 “위기감”이라고 답했다. 그는 “중국 철학의 수준이 아직 낮지만 그들은 어떤 외국 고전이든 완전하든 아니든 자신의 언어로 바꿔본다. 한국은 최근에야 칸트 전집이 완간됐지만, 중국에는 직접 번역된 전집만 3종이나 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우리말로 학문하지 않으면 20~30년 후 분명 중국으로부터 철학을 수입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전’ 완간은 별 의미가 없다. 후학이 각 개념을 물어뜯고 짓이기다 보면 내년엔 새 사전이 만들어 지는 법이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완간을 통해 논쟁의 경계, 링의 루프를 만들었다. 완간된 ‘대개념 사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신 교수는 “만신창이가 되어도 좋으니 진정성을 지닌 학자들이 이 책을 밟고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우리 철학’을 하는 사람이 다음 계단을 쌓기 위해서 한 번은 반드시 짚고 가야할, 우리 철학의 밑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5권의 책이 다루는 60개의 개념은 ‘정립’된 것이 아니라 ‘제안’된 것이다. 장회익, 정대현, 김상봉, 백종현 교수 등 학계 권위자를 필자로 갖췄음에도 <우리말 철학사전>의 의도는 겸손하다. 편집자들은 책이 무자비하게 비판을 받더라도 한국 철학계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넓은 안목에서 인문학 전반에 대한 자성을 끌어내려는 의도도 보인다. 한국 철학계의 고질적인 병폐 두 가지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논쟁에 침묵하는 것과 계파에 줄서는 것. 신 교수는 철학자들에게 “학설을 깨어도 좋고 극단적인 비판을 해도 좋다. 다만 논쟁의 장으로 나와서 말하라”고 주문했다.
<우리말 철학사전>의 권위 있는 필자들의 글에 대해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은 계파를 초월해 한국 철학이 발전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편찬위원회는 논쟁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지난 16일 열린 출판기념회를 간담회 형식으로 진행했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사전적 의미의 ‘사전’으로 보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랑’, ‘마음’ 등 순우리말을 제외하고, 한자어·일제한자어에서 유래한 개념어에 대한 우리 원어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 △각 개념어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유래를 찾으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 △개념화를 위한 방법이나 서술양태에서 독창적이지 못하다는 점 △사유가 깊어질수록 서양철학사전이 연상된다는 점 △우리 개념에 대한 주체적인 해석이 미흡하고 오히려 외국 개념을 빌어 우리 개념을 설명한다는 점 △대·중·소 개념분류 기준과 개념어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는 점 △한국철학을 대표하는 ‘사전’이란 제목을 쓰지만 실제로 주류 철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점 △한국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철학자들이 아닌, 전적으로 한 의사 독지가에 의해서만 사업이 진행된 점 △항목 중에 우리에 대한 언급이 한 마디도 없는 장도 있다는 점 △수많은 철학자가 있음에도 명망가 중심으로 필자를 구성하거나 중복된 필자가 많다는 점 △‘우리 철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 등이다.
한편 <우리말 철학사전>은 역사적으로 한국 인문학 ‘지금 이곳’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 철학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유를 독창적으로 적었음에도 여전히 서양철학에 종속돼 있음을 보여줬다. 개념어 하나하나에 대해 지금까지 누구도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하지 않았다 싶을 정도로 필자들의 글이 지나치게 독창적이라는 점이 서글프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