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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못 떠난다” 민심에 박물관 건립
“공주 못 떠난다” 민심에 박물관 건립
  •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 승인 2007.06.1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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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송산리 6호분 암거공사중 발굴된 ‘무령왕릉’

공주박물관은 일제통치시대 공주고적보존회가 모태가 된다. 광복 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개관되면서 경주에 있는 조선총독부 분관이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태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백제왕 무덤들 모두 도굴 당해
공주 웅진동에 마련된 지금의 공주박물관은 2004년 5월 14일 준공되어 현대식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국립공주박물관은 한마디로 말해서 백제무령왕 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시된 유물은 무령왕릉 출토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어 발굴된 것은 1971년 7월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어언 36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일대는 분명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큰 봉토무덤이 십 수기 모여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모두 도굴되고 빈껍데기만 남아있었다. 도굴된 무덤 가운데 소위 송산리 6호분이라고 이름붙은 壁畵 무덤이 있어 일제강점기부터 보존이 되어왔고 광복 후에도 사적 제 13호로 지정 보호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 있는 벽화가 세월이 갈수록 퇴화되고 더구나 여름철이면 장마와 아울러 무덤 내부공기와 바깥공기의 차이로 말미암은 結露현상이 일어났다. 벽면을 따라 물이 줄줄 새듯 흘러내려 벽화를 급진적으로 망가뜨리고 있었다. 무덤의 뒤쪽을 통해 흘러드는 물을 차단하기 위해 횡으로 暗渠공사가 계획되었다.
이 암거공사는 아무도 생각 못한 백제 제 25대 무령왕의 능침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7월 5일 암거공사 인부의 삽날에 백제시대 塼石이 걸렸다. 공사 현장소장은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공주박물관장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공사감독관에 알렸다. 보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국립박물관장에게 발굴책임을 부탁하고 아울러 문화재연구실(현 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을 발굴에 투입했다. 이렇게 급조된 발굴단은 7월 7일 현장으로 급파되었다. 모두들 영문도 모르고 당일 현장에 도착한 조사요원들은 그때서야 전돌로 쌓아 축조한 백제무덤을 발굴하게 된 것임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공주에서는 왕릉을 판다는 소문이 나돌아 구경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왕릉판다’ 소문에 구경꾼들 몰려
한여름의 불볕아래 인부를 독려해 무덤의 입구를 완전히 노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그렇게 맑고 화창한 날씨가 저녁 무렵 갑자기 천둥, 벼락과 함께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일단 발굴조사를 마치고 다음 날 계속하기로 했던 조사단은 발굴을 통해 마련된 구덩이에 물이 차면 무덤 안으로 들어갈 확률이 많아 허겁지겁 물길을 터야만 했다. 이것은 비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연과의 싸움이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비 때문에 사생결단으로 물고를 터고 난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그러자 놀리듯 비도 멎었다.
다음날 드디어 아치형 무덤입구를 막았던 전돌을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무덤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자 순식간에 안에 있는 유물들이 썩어 없어졌다” “무덤을 열자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가 없어졌다”는 등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어쨌든 무덤이 열리고 나서 16시간에 모든 발굴조사가 종료되었다. 꼬박 하루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 8시경에 발굴이 끝났다.
발굴조사결과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임이 밝혀졌고 왕의 이름을 새겨놓은 誌石을 비롯 108종 3천 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어 잃어버린 백제의 역사를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수많은 자료를 얻는 개과를 올리게 되었다.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나면 발굴유물 정리와 아울러 유물의 보존대책을 세워야 하고 조사보고서를 완성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물을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겨 그간의 일련의 절차와 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일반 공개를 위해 전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출토유물을 옮기고자 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발굴된 유물은 단 한 점이라도 공주를 떠날 수 없다고 공주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박물관 뜰로 돌맹이가 날라들고 단 한 점이라도 공주 밖으로 옮기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등 공공연히 조사원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공주박물관 건립” 담화 후에야  진정
그런 가운데 쥐도 새도 모르게 왕과 왕비의 순금제 冠飾을 비롯 은팔찌 등 중요유물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집무실로 나들이하기도 했고 공주박물관은 전국에서 걸려오는 좋지 못한 전화로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가 새로운 공주박물관을 신축 건립해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을 전시하겠다는 담화형식의 발표를 하고 나서야 출토유물을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충청도관찰사의 본관 건물인 선화당을 영산공원에 옮겨 공주박물관으로 사용하다 무령왕릉을 모티브로 해서 공주박물관을 새롭게 건립하고 모든 출토유물을 옮겼다. 
사실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은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왕릉발굴이란 사실 뿐 아니라 왕의 무덤이란 특수성 때문에 세상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의 흥분은 말할 것도 없었고 앞지른 언론보도의 효과는 학술적으로 접근해야 할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뒷전으로 밀리게 했다. 오로지 왕릉에 함께 묻힌 부장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긴 군중들은 빨리 유물을 보고자 아우성이었다. 이러한 당시의 현장 여건은 무덤의 보호는 말할 것 없었고 조사단으로 하여금 차분히 조사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고고학적인 유적발굴사에 있어서 졸속발굴의 대명사가 되어 부끄럽게도 오점을 남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유전 /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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