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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운동, 현재의 새로움 더해져야 ‘의미’
농민운동, 현재의 새로움 더해져야 ‘의미’
  • 교수신문
  • 승인 2007.06.0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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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기획시리즈]동학농민운동

왕현종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에서 자주성과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학의 포·접 조직을 통해 거대한 농민운동조직이 형성된 점, 치밀한 정치 개혁 전략으로 운동의 수준을 높여나간 점, 토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했다는 점 등을 예로 들었다. 왕 교수는 “21세기 현실의 운동 선상에서 농민전쟁의 새로움에 대한 시야를 획득하자”고 제안한다.

1894년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고부 농민 봉기에서 1895년 4월 전봉준 등 지도자들의 처형에 이르기까지 전라도와 조선 전국에 걸쳐 진행된 농민들의 반란운동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었다.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용어 논쟁도 있었고, 역사적 성격 규정에 관한 논쟁도 거듭하였다. 크게 쟁점이 된 부분을 들자면, 하나는 동학(東學) 사상과 조직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동학과의 관련성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혁명적이었으며, 지향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이었다. 

보수적 충군애국주의자인가
농민전쟁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면서 혁명 운동의 효시로 추앙되었으며, 1950~60년대 북쪽과 남쪽에서 조선후기이래 내재적 발전이 있었다는 역사해석에 입각하여 농민전쟁의 반봉건적 성격이 크게 강조되었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 한국근대사 연구에서는 농민전쟁이 반봉건,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이므로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평가해 왔다. 물론 1980년대 중반에는 농민전쟁의 성격이 ‘반근대’ 지향이라는 민중주의적 관점도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19세기말 한국사회가 객관적으로 근대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시기였으므로 농민전쟁은 어쩔 수 없이 근대사회의 지향을 담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1994년 농민전쟁 백주년을 맞이하여 농민전쟁의 과정과 성격을 둘러싸고 재평가하는 연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중에서 그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쓰였던 오지영의 ‘동학사’가 역사 소설로서 허구였다는 비판이나, 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을 보수적 개혁가이자 의병장으로 평가한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실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으나 최근에 이 연구를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 이룩된 실증주의적인 해석이라고 추앙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실제 논지는 민중주의적 해석이나 근대지향적인 평가에서 벗어나 농민군의 근왕주의적, 보수주의적 성격을 부각시켜보자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농민들은 본래 근대지향적일 수도 없었고, 독자적으로 반란을 이끌지도 못했으므로 혁명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부적을 지니면 총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합지졸의 농민군이 근대적 무기를 가진 훈련된 일본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하여 농민군과 지도자의 우매성을 질책하고, 나아가 민중·민족주의적인 주류 해석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사실 1894년 농민전쟁에 대해 근대지향적인가하고 묻는 것은 약간 넌센스에 속한 우문이다. 왜냐하면 농민전쟁의 주도 세력 중에는 전통적 유교 지식인이 많으며, 대다수 참여층은 소빈농인 농민들이라서 시골의 촌뜨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서구의 근대 문명,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따위를 알 수 있냐고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50년간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근대’란 위에 언급한 것만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농민전쟁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오백년 이상 지속된 조선왕조국가와 그 사회구조를 파괴하면서 새롭게 형성해 내는 어떤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인 성격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를 유추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종전과 다른 새로움은 무엇인가. 

농민운동 경험적  성과에 주목해야
1894년 농민전쟁은 1862년 임술 농민항쟁이후 30년 동안 은밀히 진전되고 있었던 농민운동의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농민들은 군현단위의 민란을 벗어나 동학의 포·접 조직을 통해 지역 간의 연대를 이루고 여러 차례 큰 규모의 집회를 열었다. 당시 “난리가 나서 참 잘되었다”는 기존의 정치체제 전반에 대한 부정과 농민봉기의 정당성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1893년 말에는 소위 ‘사발통문’ 계획을 통해 봉기의 계획을 세우고 거대 반란의 지휘부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접의 조직 내에 참여자들이 출신에 상관없이 서로 공대하면서 평등한 관계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지휘부 자체가 다양한 출신으로 형성되었다. 종래 민중 반란의 조직 구성과는 차원을 달리하였다. 이들은 무려 30여 년간의 민란 경험 속에서 거대한 운동조직을 형성하였다. 이는 종전과 전혀 다른 새로움이다.
또한 이들의 정치 개혁 전략은 매우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고부에서 전라도 일대로 바로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1차 봉기를 통해서 전라도의 거점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몇 차례 창의문과 격문을 통해 봉기의 정당성을 알렸으며, 정치적 요구의 수준을 높여 대원군의 집권을 요구한다든지, 전주성을 점거하면서 폐정 개혁안을 올린다든지 하면서 운동의 수준을 높여갔다. 또한 집강소 시기에 구래 신분제의 폐단을 실질적으로 타파하고 노비를 해방시켰으며, 농민 위주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관철시키고 농촌사회를 농민 위주로 근본적으로 개편하였다. 당시 정세의 변동 속에서 농민들의 정치적 요구를 구체화시켜 혁명적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 창의문에서 강조된 유교적인 합리주의 명분 강조나 근왕주의적 태도 등을 들어 전통적인 유자(儒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창의문은 유교적인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천명한 것에 불과하고, 내용상 대체로 유교적 지식인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농민전쟁을 창의하고 이념을 확산시키는 운동선상에서 발표된 선언서라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동학사’에 실린 폐정개혁 강령 12개조는 1926년 초고와 1940년 간행본을 비교해 보아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를 일제 강점기의 사상을 역으로 주입한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이다. 특히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사” 조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농민들의 요구가 전통적인 평균주의적 토지분배나 경작지 분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농민들은 현실 지주제의 모순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었고, 이 같은 조항을 통해 토지개혁을 추구하였다. 무엇보다도 농민들이 토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했다는 측면에 의의가 있다. 이들의 주장이 자본주의적인가 사회주의적인가라는 체제 지향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이상을 현실로 실현하고자 했던 사실을 중요시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지만,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이 또 다른 새로움이었다. 

농민전쟁은 주권 수호 행위
당시 농민들은 동학사상과 같이 절대적인 배외주의적 배척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농민군은 한·일간에 체결된 조약을 위반하지 않는 일본상인의 상업 활동은 허용하고 있었다. 다만 일본군이 폭력으로써 한국의 주권을 부정하고 유린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재차 봉기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농민군의 항쟁은 정당한 주권 수호 행위였다.
이때 유감스러운 사실은 일본과의 대립을 중재할 어떤 국내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국왕은 농민군 진압에 철저하게 동조하고 있었다. 막바지 공주전투가 시작될 즈음인 11월 4일 국왕은 “일본국은 다른 뜻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를 도와 난을 평정하고 정치를 고치고 백성을 편안케 하여 이웃의 화목을 돈독히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호하고 있었다. 이는 침략자 일본에 대항해 자신에 적대적이었던 이서와 영병들에게 제휴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던 농민군의 태도와 대비된다. 이런 2차 전쟁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점이 충군애국의 논리에 입각하여 ‘일군만민(一君萬民)’적인 이상사회로의 회귀였다는 주장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에 불과하다.
더구나 한국 근대국가 형성과 근대화의 길목에 서서 농민들은 근대 법에 의해 재판을 받지도 못했다. 근대법이 시행되기 불과 이틀 전에 농민전쟁의 지도자들은 전격 처형되었다. 단지 왕조에 반란을 했다는 죄목이었다. 농민들이 주장해왔던 인간 평등, 남녀동등권, 인권 존중, 정치 참여의 권리 보장, 자주 독립의 국가 유지와 국민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할 수 있는 재판장에서의 자기 변론 기회조차 박탈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행위와 경험은 근대화의 주창자인 지배엘리트를 두둔하려는 연구자들의 상상적 이해 수준을 넘어서 있다.

농민전쟁 독자성·새로움 재발견해야 
1894년 농민전쟁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어차피 민중의 경험과 기억의 역사에 속한다. 후대의 지배층이나 연구자가 상상하는 것처럼 지도 계층에 의한 종속적인 변수이거나 하위적인 개념이 아니다. 반대로 농민전쟁은 고유한 독자적인 작동의 원리가 있었다. 실제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은 스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894년 농민전쟁을 과연 근대지향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늘날 거의 의미 없는

질문이 되었다. 도리어 21세기 오늘 현실의 운동 선상에 서서 농민전쟁의 새로움에 대한 시야를 획득할 때 비로소 역사적 지향점을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왕현종 / 연세대·한국근대사


필자는 연세대에서 ‘갑오개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대한제국과 일제 시기의 토지제도 개혁의 비교 연구를 하고 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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