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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적 판단 평가땐 글 자체에 집중해야
비평적 판단 평가땐 글 자체에 집중해야
  • 유희석 전남대 교수
  • 승인 2007.06.04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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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변]장현근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제439호)에 답한다

먼저 졸저에 대한 서평으로 문학이 아닌 동양정치사상 전공자가 나서준 데 저자로서 특별한 고마움을 느낀다. 평소에 분과학문들의 경계에 깊은 의문을 품어온 터라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도 한다. 우리 학계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평론집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위한 지면을 졸저에 대한 서평을 계기로 얻은 것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장현근 교수(이하 논자, 또는 평자로 지칭)의 호의어린 읽기와 과분한 찬사에 대해서는, 앞으로 그런 호의와 찬사가 공허하지 않게끔 공부를 더욱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논자가 비판적으로 지적한 논점을 중심으로 화답하고 싶다.   
  
   비판의 쟁점들
  
   논자는 “문학으로 사학·철학·사회과학을 겸하고 자연과학까지 수용하는 모레띠적 노력을” 가장 먼저 요구했다. 우리 비평계에서 너나없이 영화나 여타 문화현상을 문학과 엮어 논하는 것이 유행이지만, 모레띠만큼 치열한 문제의식과 자기만의 독자적 관점을 가지고 작업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모레띠적 노력’을 적극 수용하는 입장이지만, 다른 한편 ‘통관철차’만은 더 까다롭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그의 매력적이면서도 도발적인 가설들을 직수입하기에는 우리의 문화지평은 여전히 껄끄러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에 대한 초기(10년 전)의 비판적 인식이 후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일단 10년 세월이 흘렀으니 월러스틴 같은 사회과학자에 대한 입장도 어딘가 바뀌어야 마땅하겠다는 말로 답변해야 하겠다. 졸역의『지식의 불확실성』(2007, 창비)에 딸린 비교적 긴 ‘옮긴이의 말’에서 그 변화의 단면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입장선회라기보다는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우리가 안다고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이 세계를 쉼 없이 ‘심문하는’ 월러스틴의 지적 작업에 대한 온당한 평가를 암중모색하며 시도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이 서구 지식인들의 급진성을 우리의 현실문맥에 맞게 충분히 소화할 정도로 자립하고 있다고 보지 않지만, 스쳐지나가면서 던진 최장집 비판을 여기서 상론할 계제는 아니라고 본다.

   다른 한편, 논자는『근대 극복의 이정표들』1부에 실린「김수영론」을 예로 들어 “민주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만을 우리 사회의 진로로 보는 시각은 과잉이 아닌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비판의 취지를 심분 접수하면서도 저자로서 그 평문에 대한 좀 더 자상한 이해를 바라고 싶다. 1960년의 4?19를 좌절시킨 5?16 군사 쿠데타는 87년 6월 항쟁으로 종식된 이른바 63체제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4?19의 뜻이 꺾이는 현실에서 그야말로 ‘온몸의 고뇌’를 보여준 이가 김수영이다. 사실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평등과 자유를 누구나 입에 달고 살지만, 무비판적으로 신봉하기에는 그런 평등과 자유도 하나의 가정(假定)임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실체는 20세기 인류의 역사적 실험에서 어느 정도 드러난 반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검증 중에 있는 하나의 사상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니까 민주주의 식으로 싸워야 한다”는 김수영의 경구도 그런 인식을 담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1960년대 남한현실은 민주주의의 형식적 기본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명한다면 김수영의 시작(詩作) 전체를 그런 ‘기본’을 갖추기 위한 시적 투쟁으로 본 저자의 논지에 평자도 큰 이견은 없지 않을까 싶다.

   같은 맥락에서. 평자는 “동구권 몰락을 자본주의 승리로 정리해버리는 것도 사회과학에 관심 있는 작가들을 설득시키기 어려운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필자가 설마 자본주의의 ‘승리’를 그렇게 순순히 수긍이야 했겠는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의 승리로 ‘정리해버렸다’기보다는 몰락으로 인해 자본주의라는 것이 도대체 뭔가 라는 물음이 더 절박해졌다는 것이 졸고의 논지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한다.「작품, 진영, 문학운동」의 결말 부분에서 “변혁의 신념도 이제는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두면서 자본주의 현실의 일상성에 좀 더 깊이 뿌리내리는 모험을 요구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런 뜻에서이며, 김영하, 백민석,윤정모 등 당시 ‘신진과 중진’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비판한 취지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과연 졸저가 ‘잣대’로써 작품을 가두었는가
  
   하지만 평자의 서평에서 가장 민감하면서도 논쟁적인 지적은 스쳐지나가듯 언급한―소위 문학권력과도 무관하지 않을―비평의 잣대 문제일 듯하다. 자기만의 잣대가 없는 이를 비평가라고 부를 수 없다면, 일반 독자들이 호응할 수 없는 비평적 판단을 내리는 이도 참다운 비평가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졸저 2부에 실린「감수성과 비평적 판단」에서 논했듯이 자기만의 관점이 없이 이론에 휘둘리는 것도 문제지만, 비평적 판단을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해서도 진정한 평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비평행위의 어려움이다. 논자는 필자가 “미리 잣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작품을 가두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작가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진영과 주제라는 틀 속에 작가 전체를 담아버린 129쪽 이하의 신랄한 평가”를 문제 삼았다.

   그 평문에 대해서는 졸저 머리말에서도 ‘치기’라는 표현으로 어느 정도 자기반성의 뜻을 내비친 바 있다. 아직 치기가 남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평자의 그런 비판은 과도하다는 느낌이다. 논자 자신은 “솔직한 잣대로 인류 보편성의 산물인 문학을 잘 이해하게 해”준다는 유보를 달았지만, 그런 유보로 서평의 균형이 잡히는 것은 아니며 비전문가라는 평자의 ‘겸손’에 면피가 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그런 식의 비판은 졸저 머리말에서 민족문학 2세대 운운했던 필자가 ‘창비’와 리얼리즘에 가깝다는 평단의 통념과도 상관없지 않을 듯하다. 그 가까움에 대해서는 필자도 마냥 편하게 느끼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독단적 잣대라는 비판은 앞으로도 유의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치밀하고 정확할지라도 그것이 잣대인 한 그 잣대 자체의 생명력은 작품을 통한 수정과 교정으로써만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대성을 안고 갈 수밖에 없는 비평적 판단을 평가할 때 세간의 평보다는 글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상식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옹호하고 나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과연 가령 논자의 전공영역인 순자, 나아가 동양정치사상 전반에 관한 저작을 필자가 과연 그만큼 열심히 읽고 서평할 수 있을까? 그런 기회가 필자에게도 오기를 바란다.

유희석 / 전남대·영어교육과


 

필자는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김소진과 1990년대> 등의 평론과 <근대화의 신기루> <비평의 기능>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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