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0:45 (금)
‘시대’ 고려한 개화파에 대한 연구를
‘시대’ 고려한 개화파에 대한 연구를
  • 교수신문
  • 승인 2007.05.28 0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비평 기획시리즈]조선 개화파 논의<2>

주진오 교수는 개화파를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 시대적 정황을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19세기 말 근대 국민국가는 유일한 대안이었으나 이는 근대를 이상적 가치로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화파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개화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고 적었다. 

개화파란 문호개방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던 관료 및 지식인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체로 18∼19세기 집권 노론세력 내부에서 나타났던 북학론을 계승한 경화사족들이 중심이 되었다.
사실 오늘날 개화파를 굳이 칭송해야 할 이유도 없고 폄하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였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개화파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개화파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대해서 민중사관에 입각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그러한 논거에 대해서 면밀하게 검증하고 비판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1876년 조약체결을 통해 조선사회는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는 조선 사회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 왔으나 동시에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비록 18∼19세기에 실학, 북학론, 개국론 등이 있었지만 그 자체가 근대적 사상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대개혁론의 내재적 발전은 인정하기 어렵다. 아울러 근대변혁의 주체가 민간 영역에서 성장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농민적 코스의 근대화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근대 국민국가는 유일한 대안
당시 근대 국민국가는 선택가능한 유일한 대안이었고 그것을 수립하기 위한 주도권은 집권세력으로서 고종과 개화파 관료집단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과정으로서의 근대화와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것으로써 근대를 이상적 가치로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위 탈근대 및 탈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학자들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가 근대 국민국가 수립이었다는 것을 근대지상주의라고 비판할지 모르나 그것 역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비역사적 발상이다. 
고종은 1873년 친정체제를 수립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지도 못한 채  대원군의 끊임없는 권좌 복귀시도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방사회에서의 여론 주도층들과 대립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개화파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고종의 측근세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결합시킨 매개체는 민영익이었다. 그를 통해서 김옥균, 홍영식, 어윤중과 같은 젊은 관료들은 물론 이동인과 같은 승려, 유길준과 같은 서생 등이 결합하였다. 민영익은 이들과 함께 조사시찰단 파견을 주도하고 통리아문의 당상을 맡았으며 조미수호조약을 진행하였고 유학생의 파견에도 간여하였다. 당시 이들의 이념을 굳이 분류하자면 동도서기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로 서양문물을 둘러본 도미사절. 출처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上>, 서문당, 1987.
청의 지배에 대한 이견들
그런데 1882년 고종 체제에 대한 쿠데타가 시도되고 청이 개입하여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종래의 종주권은 이제 청이 조선에 대하여 실질적 지배를 시도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개화파 사이에 분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882년 가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청의 종주권 강화가 오히려 조선의 국권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방편이라고 해석하면서 막대한 국고가 들어가는 군사력 증강이라는 종래의 목표를 수정하여 자수자강을 주장하는 세력이 청의 지원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의 외교사절 경험을 통하여 문명개화론을 수용하고 청으로부터 자주권의 회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독립주권을 수립하려는 소수의 관료집단이 형성되었고 그들이 1884년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상황까지 나아가게 된다. 앞으로 이들의 사상형성과 정변감행의 배후에 있었던 일본 ‘자유민권운동’ 세력의 역할에 대해서 면밀한 검토가 더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들은 문호개방을 통해 조선이 일본 및 구미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제법적으로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함은 물론 중국이 1882년 이후에 가해오고 있었던 실질적 외압에 대해 대립하였다. 그 점에서 이들은 근대적 국제법 질서를 누구보다 일찍 이해하였고 근대 국민국가 수립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당시 동도서기론조차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고 대원군 세력들의 정치적 도전을 받고 있었음을 감안해본다면, 이들이 동도서기론자들을 수구파로 매도하고 제거하려 했던 반면 오히려 대원군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은 정치사상이나 정치운동 면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결국 정변이라는 정치적 행동은 오히려 조선의 근대화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문명개화론자의 인식 전환은 사실 혁명적 변화였다. 원래 조선인들에게 있어서 동아시아는 문명이었고 서구는 ‘야만’ 또는 ‘짐승’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미 문명화 즉 개화된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오히려 조선이 개화를 해야 할 나라, 즉 야만 또는 반개화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었다. 문명개화론의 수용, 즉 동도서기론으로부터의 단절은 박영효·김옥균 등이 1882년 수신사로 일본에 가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나고 명치일본의 성과에 감명을 받게 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당시 문명개화론이 동도서기론보다 우월하다거나 독립론이 사대론보다 세계정세의 흐름에 맞는 사고였다고 규정짓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당시에 활동했던 인물에 대해서 동도서기론에 가깝다고 평가하는 것이 그의 사상을 폄하한 것으로 간주되거나, 독립론을 부정했다고 하여 그를 친청사대파로 폄하했다고 보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이때에 김옥균 등의 문명개화론자들이 체계적으로 남긴 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이 이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점이 오히려 그들이 문명개화론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아울러 그들의 생각이 조선을 문명으로 자부하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얼마나 수용되기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개화파와 군주권과의 관계
그런데 개화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군주권과의 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대체로 이 시기 군주권을 전제군주제로 규정하면서 개화파의 정치구상을 군주권의 제약과 내각책임제나 의회제 도입으로까지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군주권은 반드시 약화되어야 긍정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이 새로운 사회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상황에서 왕권은 근대국민국가의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군주권의 약화와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은 반드시 모순관계인 것은 아니다.
사실 일본의 경우 왕권이 명치유신을 비롯한 근대개혁의 버팀목이었다. 일본을 모델로 근대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을 내세웠던 개화파가 계속해서 왕권을 약화시키고 때로는 대원군을 앞세워, 또는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권력을 운영해 나가려고 했던 것은 고종이 주도해 왔던 일련의 근대화 작업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바탕을 이루었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군주권을 실질적인 정치운영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던 것이다. 물론 군주권은 근대 국민국가에 걸림돌이 되는 순간 국민주권론에 의해 극복될 것이나 적어도 당시의 시대적 조건에서는 조숙한 것이었고 오히려 외세와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국민적 반발을 초래하여 좌초하게 된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개화파들이 생각한 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상은 국민주권론이나 민권론에 대한 체계적 이해에 기반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들이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경우 일정 시기 국권론과 민권론으로 나뉘어 치열한 대립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개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국내 분위기에서 민에게 주도권을 준다는 것을 개화파들이 상정했다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국내적 지지기반도 없고 공감도 얻지 못한, 근대국가에 대한 이해를 시작한 지 불과 2년 남짓 만에 민주적 정치체제를 이해하고 도입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비역사적 발상이 아닐까.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은 개화파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조건에 바탕을 둔 개화파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주진오 / 상명대·역사콘텐츠학과


필자는 연세대에서 ‘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 후반 문명개화론의 형성과 전개> 등 10여 권의 공저서와 30여 편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