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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40)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한국의 美-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40)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 최성은/ 덕성여대·미술사
  • 승인 2007.04.30 1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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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亂뒤 亡者들의 극락왕생 기원하는 ‘追善’

이번 호는 ‘한국의 미-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의 마지막 순서다. 목조각은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임에도 한국의 기후 조건 탓인지 고려시대 이전의 오래된 목불상은 잘 남아있지 않다.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내부에서 발견된 복장 발원문에 의해 1274년에 만들어진 아미타불로 밝혀졌다. 최성은 교수는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편집자주

□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정면 모습.(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 사진 제공)

고려후기 불교조각의 대표적인 기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불상은 앉은 높이가 118cm나 되는 비교적 커다란 상으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고려전기의 불상들과는 기본적으로 그 모습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改金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아 우리들이 흔히 사찰에서 배관하게 되는 불상들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불상의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는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투구를 쓴 것 같이 보인다. 활

□ 나주 尋香寺 건칠아미타불좌상.

처럼 휘어 끝부분이 아래로 처진 눈썹과 가늘고 길게 半開한 눈, 콧마루가 우뚝하면서도 매부리코처럼 콧날이 약간 휘어진 코, 크지 않은 입과 섬세한 입술선, 양 뺨과 턱 주위에 살이 많은 둥근 얼굴은 다소 세속화된 佛顔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머리 부분(頭部)에 비해서 넓지 않은 양어깨가 둥글게 처지고, 몸이 앞으로 굽어있어 건장하고 힘 있는 佛身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목조아미타불상은 몸속에서 발원문과 개금기 등의 腹藏物이 발견되어 고려후기 13세기 후반의 불교조각과 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像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발원문은 至元 11년(1274) 東深接 大師 中幹이 쓴 것으로 “南贍部洲 高麗國 東深接 大師 中幹願”이라는 대목에서 발원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동심접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0 아산군 산천조에 “현에서 동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된 동심산과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충렬왕 5년(1279)에 왕이 長子인 滋를 牙州(牙山) 東深寺에 보내 태자(後의 충선왕)를 피하게 하였던 記事가 보인다. 당시 江陽公 王滋는 貞信府主 王氏의 소생으로 충렬왕의 세 왕자 가운데 長子였으나 齊國公主의 소생이 아니

□ 화성 鳳林寺 목조아미타불좌상.

므로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렬왕은 큰 아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산 동심사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당시 수도 開京의 王室과 충청지역 사찰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산 동심산에 동심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간스님의 발원문에서 보이는 ‘동심접’이라는 표현은 至治 3년(1323)에 제작된 <觀經變相圖>의 畵記에 보이는 ‘楊洲接’과 ‘中道接’의 ‘접(接)’이 그 지역의 향도조직 혹은 신앙모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동심산 혹은 그 산에 있는 동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앙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래 불교결사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상기하면 중간스님은 아산지역 불교신앙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며 그 모임에서 아미타불상을 조성 혹은 보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산일대에는 고려시대 12漕倉 가운데 河陽倉이 설치되어 충청도 여러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漕運으로 수도의 京倉으로 옮겼다. 고려후기에 아산의 포구에는 稅穀을 실은 哨馬船들이 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창 소재

□ 서울 守國寺 목조아미타불좌상.

지역은 몽고침입 때 주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아산의 하양창은 江都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간스님의 발원문에 “…古寺毁□…”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牙山 연안에서 여몽간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던 고종 43년(1256)과 44년(1257) 무렵에 사찰이 훼손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아미타불상의 복장에는 至治 2년(1322)의 최춘(崔椿)의 복장조성문과 취봉사(鷲峰寺) 和光선사의 발원문 등이 조사되었다. 중간대사 발원문이 쓰여진 시기보다 약 50년이 경과해 이 불상이 개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기록과 지도를 살펴보면 동심산과 축봉사는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아미타불상은 동심산에서 축봉사로 옮겨졌고, 개금할 때 복장조성문과 중수 발원문이 불상 복장 속에 넣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 18년(1231)부터 원종 14년(1273)년에 이르는 거의 40여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철저히 파괴적이었던 몽고군은 海島와 奧地에 이르기까지 고려 전역을 휩쓸었고 황룡사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사찰이 이 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려후기 목불과 건칠불들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란 중에 훼손된 사찰을 보수하면서 조성된 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공을 막고 있는 봉함목에는 충렬왕 6년인 至元 17년(1280)에 보수되었다는 묵서명이 조사되었다.

나주 尋香寺건칠아미타불좌상과 화성 鳳林寺목조아미타불좌상, 서울 守國寺 목조아미타불좌상(철원 심원사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옴) 등은 佛顔이나 옷주름의 세부표현에서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불상들이다. 조각기법이나 착의형식 등에서 13세기 후반 조각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같은 유형의 불상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불상들은 거의 모두 아미타불로서 아미타신앙이 당시 화엄, 정토, 법상에 이르기까지 超종파적으로 성행하였다. 더불어 몽고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亡者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追善을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다고 이해된다.

최성은 / 덕성여대·미술사



필자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중국 오대 오월의 불교조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석불, 돌에 새긴 정토의 꿈>, <석불·마애불>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나말여초 아미타불상의 도상적 고찰’과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대송관계’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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