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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 환자와의 만남
표준화 환자와의 만남
  • 강원대 노혜린 교수
  • 승인 2007.04.07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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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과의사이자 교수이다. 나는 의과대학생들에게 외과적 지식과 기술을 주로 가르쳐왔는데, 몇 년 전부터는 외과 이외에 의학면담이나 의료윤리도 함께 가르치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의사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환자를 배려하면서도 실력을 갖춘 의사”라고 대답한다. 또한 기존의 의사들은 실력은 갖추었을지 몰라도 너무 불친절하고 권위적이며 설명도 잘 해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자신들은 설명도 잘 해주고 실력도 갖추겠단다. 그 중 어려운 것은 실력을 갖추는 것이고, 아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설명도 잘 해줄 수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나는 기존의 의사들도 실력과 친절을 함께 갖추고 싶어했지만 알기 위해서, 그리고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니 환자에게의 친절한 설명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진정 너희들이야말로 의사소통기술을 익혀야 할 바로 그 당사자야!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학생들도 자신의 의사소통 기술에 자만하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기존의 의사가 듣는 비판을 고스란히 다 듣게 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깨닫게 하느냐는 말이다. 내가 일일이 학생들을 한 명씩 만나서 환자 역할을 하면서 지적해주기는 벅찼고, 또 나는 교수이기에 학생들이 나를 환자로 여기면서 면담할 리도 만무하였다. 학생들이 실제 환자를 만날 때마다 옆에 붙어서 하자니, 내가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표준화환자를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표준화환자란 환자의 고통을 표준화된 형태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말한다. 학생들은 표준화환자를 만나 의사소통기술이나 기타 여러 진료 능력들을 훈련할 수 있으며, 평가도 받을 수 있다. 실제 환자를 만나 실습을 하는 것에 비해 여러 번 만날 수 있으며 표준화환자가 개선할 사항을 되먹임해줄 수도 있으며, 표준화가 되어 있어 학생들을 평가하는 데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나는 운좋게도 춘천에서 활동하는 극단 하나를 소개받고 극단 배우들을 표준화환자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학생들이 표준화환자를 일대일로 만나게 하였고 그 장면은 녹화하여 나중에 당사자에게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동영상을 보고 나서야 자신들의 모습이 불친절한 의사 그 자체였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깨닫고 나면 그 다음은 달라진다. 표준화환자를 지속적으로 만나게 되자,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사소통기술이 점점 향상되어 감을 느끼며 환자를 배려하고 능력을 함께 갖춘 의사가 되는 데에 점점 다가가고 있음에 즐거워지는 것이다.

표준화환자 면담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필요하였다. 표준화환자들이 실제 환자처럼 연기하기 위해서는 시나리오에 환자가 말하게 되는 대사와 모범적인 의사라면 말하게 되는 대사, 자세와 목소리 톤, 제스쳐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환자를 배려하는 의사라면 어떻게 말할까 하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환자에게 말하듯이 써보았다. 그리고 읽어보았다. 아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나야말로 의사소통기술을 익혀야 할 바로 그 당사자였던 것이다. 충격을 받은 나는 관련책자들을 사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부한 대로 시나리오에 쓰기 시작하였다. 시나리오를 가지고는 표준화환자와 4시간 정도 함께 훈련을 한다. 이때 나는 의사역할을 하면서 표준화환자에게 연기 지도를 하였다.

그러기를 5년, 이제 내가 쓴 시나리오가 60개를 육박한다. 그리고 내 자신이 조금은 바뀌었음을 느낀다. 시나리오에 썼던 대로 환자와 면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학생을 교육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만이었다는 걸, 학생을 가르친다는 게 결국 나를 가르친다는 의미였다는 걸 새삼 느낀다. 표준화환자와의 만남은 학생 뿐 아니라 나에게도 새로운 메시지를 전해준 것이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너희들 면담 기법 공부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같이 노력해보자고.

노혜린 강원대 의대 외과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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