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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 고민할 때”
“동아시아 속에서 한국의 정체성 고민할 때”
  • 김재호 기자
  • 승인 2007.02.28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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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학문 차원을 넘어 정치 영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대권주자들 간에 전개된 친일파논쟁이 그 실례이다. 역사해석이 시대적 흐름에 의해 한쪽으로 편향되거나 정치적 논리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관련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역사논쟁의 논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우리의 현 좌표를 확인하고 21세기 동북아시대에 부응하는 한국의 미래상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를 위해 ‘21세기 한국의 미래상 정립을 위한 역사논쟁’이라는 제목 하에 일련의 역사비평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

일시 : 2007. 2. 27(화). 오후 2시  

장소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사회: 신동준 본사 편집국장(정치학)
참석자: 국민대 김영수(정치학), 동아시아학술원 미야지마 히로시(역사학), 동아시아학술원 윤해동(역사학)
정리 : 김재호 기자

사회 :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 사회에서 한국의 80년대 이후의 논쟁은 ‘해방전후사 인식(이하 인식)’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정부의 실패와 관련해 '인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오늘 논의에서는 이런 문제를 포함해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한 역사논쟁의 핵심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 먼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실학 및 근대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미야지마 : 현재 실학을 근대적인 사상으로 볼 수 있는지, 실학이 성리학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실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성리학이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성리학이 왜 전근대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 일본에서도 한때 주자학을 봉건사상, 불교를 노예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당시 이에 대한 많은 비판이 나왔다. 유럽의 중세기독교 사상과 비교해 동아시아의 성리학은 어떤 성격이었는지 등에 대한 근본문제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성리학은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경제, 사회, 가족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회 : 성리학은 봉건적이고, 실학은 근대적이라는 주장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김영수 : 실학은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부각된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이 실학을 사상적으로 성리학과 대립되는 학문으로 간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실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성리학은 합리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게 조선이다. 한국사를 연구할 때 서양사에 맞추지 말고 동아시아 자체적으로 어떤 식의 역사가 형성됐는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성리학은 낡은 것이고, 비합리적이고, 반근대적이라는 주장은 서양의 근대를 전제로 삼은데 따른 것이다.

사회 : 그러나 성리학 자체가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까닭에 많은 비판을 받은 것 또한 사실이 아닌가?

윤해동 : 1950년대에 소위 '자본주의 맹아론'이 나오면서 실학에 근대적인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현재 '자본주의 맹아론'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직도 그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의 경제사회 변화에서 자본주의적 양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 많다. 16세기 동아시아의 역사는 서양과 다르게 전개되었다고 볼 때, 조선후기 사회는 동아시아 전체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실학은 일본의 국학과 어떻게 다르고, 베트남 등 주변국가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등에 대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사회 :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주자학을 신봉해서 근대화를 실패했고, 일본은 주자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견해는 타당한 것인가?

미야지마 :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그런 관점에서 '근대적 사상의 탄생'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에도시대에 유교사상이 들어왔으나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체제사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성리학은 도쿠가와 막부를 견제하는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막부 말기에 와서 유럽세력이 일본에 위협으로 대두하면서부터였다. 마루야마의 생각은 일면 타당하지만 체제문제까지 생각했을 때는 무리가 있다.

사회 : 양명학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개국을 주장한 것은 '존왕양이'의 차원에서 나온 것으로 일본의 식민지화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대원군의 ‘척화양이’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일본적인 양명학과 성리학이 근대화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김영수 : 일본의 성리학은 통치사상을 제공한 게 아니라 도쿠가와막부가 필요하면 꺼내 쓰는 지식창고의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의 다산 정약용은 17c 이래로 서양의 근대사조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남인 출신이다. 그는 천주교 세례를 받으면서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걸 꼭 근대라고 이름붙일 필요는 없지만 성리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제시하고 노력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사회 : 동아시아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의 고증학과 한국의 실학, 일본의 고학은 사실상 같은 맥락이다. 주희의 경전해석에 대한 반론이 한중일 3국의 공통된 흐름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비교연구할 필요가 있다. 서양의 봉건은 동양의 봉건과 전혀 다르다. 진시황 때 이미 상비군과 관원, 토지제도가 완비되었다. 서양은 신분세습의 봉건질서가 18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실학과 근대에 관한 논점이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으로까지 연결된 듯하다.

윤해동 :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서문에도 썼지만, ‘재인식’의 출현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는 민족민중주의적 시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당시 학계에는 이와 다른 흐름이 존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식'의 민족민중주의적 관점에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재인식’의 등장은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재인식’이 뉴라이트 운동에 과도하게 이용되면서 그 진정성과 최초의 순수함이 훼손된 게 아닌지 의문이 든다. 나아가 ‘재인식’ 자체는 내부적으로 서로 다른 2-3개의 시각이 겹쳐 있어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는 기존의 실증주의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사료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언어학적 전회와 기억의 역사를 강조하고, 역사학적 방법론에서 문화사적 전회를 채용했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있다. 

사회 : 분단문제와 관련해 ‘인식’은 서양의 근대 개념을 그대로 원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재인식’은 이에 대한 반론차원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민족문제를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김영수 : 북한에 대한 인식과 한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해석, 교과서문제, 한미 FTA 문제 등을 좀 더 논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면에서 ‘재인식’은 매우 긍정적이다. 1980년대 이후 학문이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었으나 이는 한국 학문의 저력이 될 수 있다. 한국사회는 극히 짧은 시간에 복합적으로 응축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고통 받는 인간의 문제와 세계화 문제 등에 관해 좀 더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근대를 다시 읽는다’는 종합적인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능케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  ‘인식’은 민족을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하고 있으나 ‘재인식’은 이를 초월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민족문제를 어떻게 보는게 좋은가?

미야지마 : 민족개념은 18c 당시 유럽에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것으로 근대에 들어와 동아시아지역에 유입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개념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어떨 때는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양의 근대와 다르게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서양의 근대 국민국가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근대가 시작되었다. 동아시아는 영토와 주민문제에서 그 영속성이 제일 강하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근대에 와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이다. 상품화될 수 없었던 토지와 노동력이 시장으로 형성되는 건 근대경제의 큰 지표라고 볼 수 있다. 한국과 중국에서는 서양의 근대 이전부터 토지가 상품화돼 있었다. 당시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것이 없었다. 근대의 지표를 하나하나 보면, 중국이나 한국 모두 유럽으로부터 근대를 수입해서 성립한 게 아니라 그전부터 형성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과거시험을 들 수 있다. 중국의 명청 시대에는 범죄자 등 특수한 신분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시험을 보아 관원이 될 수 있었다. 조선조는 이보다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양반 내부에서는 심한 경쟁이 있었다. 양반으로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자는 30만 명 정도였으나 합격자는 겨우 9백명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근대와 포스트모던에 관한 논의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국이 미국이나 유럽과는 다른 역사적 과정을 걸어온 사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한다. 

윤해동 : 민족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민족국가 형성의 이전의 민족적 특성이 오랫동안 농축되어 왔다는 것과 근대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구분해야 한다. 국가 간 체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민족성을 가지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이야기하는 건 어렵다. 프랑스의 민족주의와 독일의 민족주의가 다르듯이 한국의 민족주의는 여타 동아시아 국가의 민족주의와 다르다.

사회 : 농촌에서의 외국인 결혼 등이 늘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도 자연스럽게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도 민족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미야지마 : 일본은 기본적으로 한국보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 많은 혼혈아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일본의 교과서로 과연 그들을 사회의 일원으로 교육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존의 역사교육은 21세기 다민족 사회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 : 21세기 동북아시대의 개막과 관련해 이번 시리즈가 갖는 의미를 평가해 달라.

미야지마 : 한국사와 관련한 역사논쟁의 문제는 단순히 한국사만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연구 및 세계사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사적인 시야를 가지면서 한국사의 문제에 접근해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앞으로는 역사논쟁을 세계사적인 의미로 연결시키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외국 연구자들의 관점과 성과를 간과한 채 내부적으로만 논의코자 하는 건 결코 생산적이지 못하다.

김영수 : 현재 근대논쟁을 위시한 역사논쟁이 국사학자와 경제학자간의 논쟁으로만 전개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학을 비롯한 다른 학문은 침묵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역사논쟁은 매우 복합적인 주제로 이뤄져 있다. 자연과학까지 포함해 관련학자 모두 자신의 문제로 인식해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으로 저변을 확대해 학제간 연구를 심화해 나가면 역사연구 내지 세계사 연구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윤해동 : 전에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한국에서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은 수입상,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고물상이다’라는 우스개 표현을 인용한 적이 있다. 이는 우리의 학문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인문학은 체계성이 부족하고, 사회과학은 한국의 역사문화적 맥락을 모른 채 다른 나라의 분석틀을 수입하는데 급급한 경향을 지적한 것이다. 현재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국가는 그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 통일 이후의 국가를 그런 식으로 상정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도 이제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국제화된 곳은 바로 농촌이다. 외국에 처가집과 외가집을 두고 있는 소위 '원거리 민족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인적 소통과 교류가 가장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는 한국도 이제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이번 시리즈의 의미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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