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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대륙을 강타하는 韓流열풍
[문화비평] 대륙을 강타하는 韓流열풍
  • 김근 서강대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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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9-25 09:53:00

김 근/서강대·중국문화

‘한류’란 중국에서 ‘韓國流行文化’를 축약해 일컫는 말이다. 무엇을 축약어로 지칭한다는 것은 그 개념이 일반적 의미를 넘어 욕망의 차원에서 인식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한국유행문화가 단순한 문화 침윤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팰러스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 축약어에서 직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류’의 의미를 문화 자체의 성격과 이를 수용하는 문화 소비자의 입장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상징으로써 세계를 의미화하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이 상징에 연대성이 개입되면 제의가 되는데, 문화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즉 제의란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흔히 ‘끼’라고 불리는 광기를 길들이기도 하지만, 연대감의 고취를 위해서는 광기를 자극하기도 한다. 유교 이념에 기초한 우리의 전통 윤리는 광기를 길들이는 쪽으로 제의를 발달시켜왔고, 그나마도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제의는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돼온 것이 사실이다. 근대성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제의가 없이도 합리성에 의지해서 살 수 있었지만, 광기가 해방된 포스트모던 시기에 들어와서는 이것이 더 이상 버팀목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고 제어할 제의를 생산하게 되었는데, 그 텍스트가 빈민들의 저항 이데올로기가 담긴 미국의 대중문화였다. 이 텍스트로 우리의 광기를 수행한 제의가 ‘한류’의 원류인 것이다.

‘한류’가 유행문화인 이상 그 텍스트가 이데올로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질적인 문화가 외국에서 유행하는 것은 기실 이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인데, ‘한류’의 텍스트가 주는 메시지는 연대감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튀기 위한’ 퍼포먼스가 주류이기 때문에 개성 중시가 저변의 이념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말로 ‘튀어서’ 외톨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유행에서 자기동일성을 찾고 또 연대감을 갖는 것이다. “우린 함께 있을 때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라는 영화 ‘친구’의 카피가 이를 그대로 규정해주는 메타언어이다. 중국인이 ‘한류’의 하나로 즐기는 불고기와 ‘진로’ 소주는 짙은 연기와 진한 마늘 냄새, 그리고 희석시킨 알코올이 너와 내가 소박하게 하나로 묶여지자는 메시지를 말한다. 마늘 냄새란 혼자 맡거나 풍기면 역하게 느껴지지만 함께 내놓고 나누면 향기롭지 않은가. 그것도 너와 나 사이의 어색함을 가려주는 연기 속에서 말이다.

‘한류’에 열광하는 나라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전통적으로 禮 문화에 의해서, 또는 마르크시즘과 같은 근대성에 의해서 광기가 억압된 경험을 갖고 있으면서, 탈근대화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도 우리가 그랬듯이 광기를 다스릴 제의의 빈곤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한류’를 수용하게 된 것인데, 이 텍스트는 자체의 이데올로기로 문화 소비자를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불어서 소비의 쾌락을 증대시켜 주었다. 전쟁에서 사기가 오르려면 영웅이 있어야 하듯이 소비가 즐거우려면 소비 영웅이 필요하다. 할리우드 스타를 영웅으로 숭배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이질적이다. 파롤에서 신화가 생산되는 것처럼 가까이에서 환호할 수 있는 스타가 신화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류’인가. 중국은 주나라 이후 은나라의 무속 문화를 변방으로 배척함으로써 狂氣를 이른바 正氣로부터 격리시키려 했다. 우리도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광기는 민간 문화 속에 면면이 살아서 우리의 상상력과 감각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일본 대중문화도 매우 감각적이기는 하나, 제의를 너무 깔끔하게 다듬은 나머지 거세된 이미지가 강해서 팰러스로서의 매력이 결여된 면이 있다. ‘한류’에서 거친 터프가이들과 건강미 넘치는 활력적인 여성스타들이 특히 인기가 높은 것은 덜 다스려진 광기가 텍스트에 흐르기 때문이다. 불고기와 소주에서도 이러한 야성의 쾌락이 발견된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한류’는 주나라 이후 퇴출된 광기의 회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들도 스스로 탈근대적 제의를 생산하게 되겠지만, 광기가 그 속에 살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상호텍스트이지 결코 자신들의 팰러스가 되지 못한다. 합리주의로는 어떻게 ‘못 말리는’ ‘거칠음’과 ‘거세되지 않음’, 이것이 ‘한류’의 생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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