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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비평]대선 앞둔 한국언론의 과제는?
[매체비평]대선 앞둔 한국언론의 과제는?
  • 이영환 미디어 오늘 기자
  • 승인 2007.02.02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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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언론, '불편부당 신화' 다시 돌아봐야"

지난 97년 12월16일. 대선을 하루 앞둔 이날 주요 언론사 정치부 기자 103명은 대선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앙일보가 ‘이회창 후보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노골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성명에서 “언론이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을 갖거나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자처한다면 더 이상 언론과 이 나라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중앙일보는 12월15일자 ‘대선 양자구도 압축’이라는 기사에서 “15대 대선이 사실상 이회창-김대중 두 후보의 대결로 압축됐다”고 단언했다. 열세를 면치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기세를 올리던 이인제 국민신당 대통령 후보 쪽은 이에 발끈해 중앙일보 앞에서 규탄집회를 갖기도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관련보도에 대해 이례적으로 ‘경고’ 조처를 내렸다. 이 같은 중앙일보의 15대 대선 개입은 2005년을 달궜던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사건의 녹취록에서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현 회장)이 나눈 대화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15대 대선이 중앙일보의 편파보도에 집중됐다면 2002년 16대 대선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대통령 선거 당일이었던 12월19일자에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제하의 사설을 싣고 사실상 ‘제2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를 시도했다. 두 신문의 이러한 정파적 행태는 이후 10년 동안 탈세로 사주가 구속되는 등 ‘정-언 갈등’을 유발하거나 언론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전반적으로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다시 이는 불공정 시비

언론계는 17대 대선을 앞두고 새해 초부터 불공정보도에 대한 우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디어오늘이 지난해 12월 말 15개 주요 언론사 보도책임자(보도·편집국장)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나타난다. 이 설문에서 보도책임자 전원은 “국내 언론들이 정파적 편파성을 띠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60%는 “올해 대선도 중립성을 견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권도 편파보도 문제만큼은 꽤 신경을 쓰는 눈치다. 우상호 열린우리당 전 대변인은 “여론지지도를 빌미로 특정 정당에 소속된 후보 중심으로 보도가 이어지면서 최소한의 여야 기계적 균형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특히 방송의 편파성을 오랫동안 문제 삼았던 신문매체가 더 심각한 편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도 “2002년 대선 때 방송, 신문, 인터넷신문 보도의 공정성이 논란이 됐는데 올해도 그런 경향을 Elf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염려했다.

언론계와 정치권의 우려는 일부 언론에 의해 이미 ‘실제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1월1일 신년사설에서 “대한민국은 지난 10년 가까이 세계 공통의 선진화 화살표를 거슬러 혼자서 거꾸로 달려왔다”며 특정 정당의 구호를 연상케 하는 주장을 펼쳤다.

문화일보 같은 날 사설은 보다 노골적이다. 문화일보는 “2007년은 1987년 체제의 ‘잃어버린 후반 10년’을 만회하는 부활의 정초(定礎)여야 한다”고 했다. ‘잃어버린 10년’은 한나라당이 정권을 내준 지 10년이 됐다는 것으로, 한나라당의 정권탈환 구호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전여옥 의원은 지난해 6월 '잃어버린 10년, 한나라당 꿈은 이루어지는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언론의 대선 개입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는 ‘국민의 시각’이 아닌 언론사 또는 언론사주의 시각으로 대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언론계의 대체적인 지적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권력으로부터의 압력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언론사주나 자본으로부터의 압력은 오히려 강화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언론계는 대선 때마다 언론 현업단체들을 중심으로 ‘공정보도준칙’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각 언론사마다 다시 노사 협의 등을 거쳐 이를 선포하도록 추동해 왔다. 일종의 내부 견제장치를 만들자는 것이다. 올해는 한겨레신문이 지난 1월29일 국민 주주들을 포함, 모두 250여명을 초청해 관련 선포식을 갖고 공정보도를 다짐하고 나선 상태다. 이런 움직임은 상반기 중 각 언론사 노조를 중심으로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이용성 한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문이 지지후보를 밝힐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 정치적 중립성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며 “언론의 대선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미디어간 상호 감시와 시민사회의 견제기능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지지후보 공개, 더 이상 미룰 일인가

하지만 내부 견제장치가 발동하고, 시민사회의 감시가 강화되더라도 올해 대선에서 공정보도가 이뤄지고, 또 언론의 정파성이 불식될 것으로 보는 이들은 매우 적다. 아니, 언론계 내부에서조차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언론계 일부에서는 잠복됐던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양지로 끌어내 사회의제화할 것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기자협회(회장 정일용)다.

한국기자협회는 최근 기관지 '기자협회보'를 통해 ‘지지후보 공개’를 공론화하고 있다. 겉으로는 객관·공정보도를 내세우지만 음성적으로는 특정 후보를 지지해온 언론의 관행을 깨고, 독자들에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자는 것이 주된 이유다. 기자협회는 또, 언론의 지지후보 공개가 이뤄지면 △언론이 정책선거 실현에 보다 기여할 수 있고 △권언유착의 가능성을 막는 동시에 언론 스스로도 언론자유를 보다 폭넓게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 다수의 다른 국가들에서는 언론의 지지후보 공개를 권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언론은 선거 1∼2주 전에 지지후보를 밝히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후보를 결정할 때 논설위원과 편집국 간부들이 토론을 벌이며, 워싱턴포스트는 사주의 입장이 강하지만 사설 이외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의원내각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언론은 특정 후보보다는 정당별 지지를 밝히고 있고, 프랑스 언론은 사장이나 편집국장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회나 사내 의견수렴 절차를 반드시 거친 뒤 주필이나 사장이 직접 지지후보나 정당을 밝히는 사설을 쓰고 있다.

김재영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한국언론은 법적인 제약(공직선거법 96조 ‘언론의 지지후보 공개 금지’)뿐만 아니라 ‘언론은 항상 불편부당하고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며 “지지후보 공개를 실현화하기에는 힘든 대목이 있지만 언론 자율에 맡기는 게 원칙적으로 맞다”고 말했다('기자협회보' 2006년 12월28일자 인용).

조준상 전국언론노조 정책실장도 “지지후보를 공개할 경우 정파적인 한국 언론의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반대로 은닉된 정파성을 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며 사회의제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7대 대선을 향한 정치권의 각축이 여당의 이합집산을 시작으로 본격화하고 있다. 정치권은 이제 국민들의 선택 앞에 놓여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 언론 또한 국민들의 선택 앞에 속내를 내놓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가를 받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영환 / 미디어오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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