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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의' 포퍼에게 쿤은 '그 적들'이었다
'열린사회의' 포퍼에게 쿤은 '그 적들'이었다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7.01.30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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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풀러의 '쿤/포퍼 논쟁'

여전히 결론 내려지지 않는, 혹은 영원히 내려질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논쟁은 지식사회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런 논쟁지점은 잊어진 듯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다가 간혹 수면 위로 떠올라 세상을 카오스로 뒤집어 놓는다. 세계적인 학자들의 희대의 논쟁이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이들의 논쟁이 개별 학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메타학문을 다룬다면 논쟁의 결론이 미치는 영향권은 그 경계를 그을 수 없다.

토머스 쿤은 너무 유명한 나머지 보통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잘 알려진 '구조'의 저자다. 이 책은 20여개 언어로 번역, 지난 30년간 10대 학문서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하버드에서 이론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과학사를 연구하면서 빈 학파가 이끄는 '통일과학 백과사전'을 작업하던 중 '구조'를 썼다. 하지만 쿤의 생각은 빈 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와는 조금 달랐다. 과학자들의 과학행위는 무의식중에 지닌 패러다임에 따를 행위이므로 차기 패러다임으로 비약하지 않는 한 과학자는 과학의 순수한 탐구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 포퍼보다 왕성하고 과감한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포퍼는 빈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익힌 뒤 1945년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적었다. 비판을 하지 않는/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는 포퍼에게는 ‘닫힌사회’다. 포퍼는 과학적 탐구를 행하면서 '반증의 가능성'을 강조한 '탐구의 논리'를 통해 과학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신분석학이나 마르크스마저 반증이 불가능하므로 종교라고 결론지은 포퍼는 예리한 논리의 칼날을 ‘견고한’ 과학에도 거침없이 들이댔다. 가상한 이론에 맞지 않는 변칙사례가 등장한다면 해당이론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포퍼, ‘과학도 다른 여러 학문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포퍼에게 과학사회 내부에 대한 논쟁을 거부하는 쿤은 ‘그 적들’이다.

2003년 스티브 풀러(Steve Fuller)가 적은 ‘쿤/포퍼 논쟁’이 최근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英 위릭대학 사회학과의 풀러 교수는 美 피츠버그 대학에서 과학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영미파 토마스 쿤에게도, 유럽파 칼 포퍼에게도 어쩌면 대체로 심판자로서의 학문 경계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저자는 과학세력도 독일과 영어권 과학(특히 미국과학)으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과학의 세력균형 역시 독일에서 미국으로 넘어갔고, 학자들과 아이디어, 연구패턴과 전략적 목표물도 이전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저자의 쿤/포퍼의 논쟁은 이러한 세력 이전 상황에서 조명된 메타과학이 과연 현재에도 유효한가를 점검하고 있다.

‘쿤/포퍼 논쟁’은 1965년 7월 13일 런던대학 베드퍼드 칼리지에서 열린 국제 과학철학 세미나에서 임레 라카토스가 마련한 두 학자간의 만남을 의미한다. 저자는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 “쿤은 권위주의자, 포퍼는 자유주의자”로 ‘거칠게’ 규정해 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상황도 이들의 학문적 입장을 정하는데 무관하지는 않다. 두 세계적인 학자들의 논쟁은 5여 년간의 여론 재판 결과, 결국 쿤의 승리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나은 쪽의 승리였는지 묻는다. 또 저자는 '사회인식론'을 연구하는 과학사회학자로서 쿤의 승리가 사회인식론을 크게 후퇴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패배한 포퍼에 대한 뒤늦은 변명이랄까. 저자는 포퍼 쪽 학자들의 말을 빌어, 쿤의 과학은 '정치적으로 연관되면서도 정치로 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탐구한다'는 모순을 안고있다고 평한다. 또 쿤의 ‘순수한 과학탐구 행위’는 과학자 사회의 과학 독점 행위이며, 쿤이 과학의 자율성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전후 미국사회에 팽배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고 비판한다. 심판이던 저자는 결국 심판역을 던져버린다. 저자는 ‘쿤의 승리가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연유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처참하게 쓰러졌던 포퍼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 논쟁은 '실재론'과 '도구주의'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상존한 학계의 ‘닭’과 ‘달걀’이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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