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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연이 이끄는 함축의 미학, '報道'寫眞은 없다
외연이 이끄는 함축의 미학, '報道'寫眞은 없다
  • 오승환 경성대
  • 승인 2007.01.29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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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포토저널리즘의 미학

좋은 작품은 작가나 몇몇의 평론가에 의해 규정되어 지는 것일까? 보는 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포토저널리즘의 미학은 사진을 보는 사람이, 보여 지는 상황의 이미지를 신뢰하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어야 확보할 수 있다. 사진을 보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사진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실패한 사진이다.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현실세계를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사진의 촬영, 현상, 인화 과정에서 인간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많은 학자들은 사진 속에 나타난 이미지가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다의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사진의 외연적 의미(denotation)와 함축적 의미(connot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사진 속에 나타난 이미지는 현실 속에 있는 대상을 지시하는 외연적 의미를 나타내지만, 이것을 근거로 하여 함축적의미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연적 의미는 사진이 찍은 대상이며, 함축적 의미는 사진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 Israeli Jewish settlers stand on a roof of a house as a fire barricade burns in the street during the evacuation of the jewish settelment of Gadid. Friday, Aug.19, 2005.

포토저널리즘의 경우에는 그것이 ‘사실의 기록(document of reality)’이고, 제목과 캡션에 의해 명확한 하나의 의미가 읽혀지기 때문에 의미의 해석과정은 외연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명확한 듯 보이는 포토저널리즘에서도 함축적 의미가 읽혀질 수 있다. 포토저널리즘은 우리에게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이것은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이 어떤 사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어떤 믿음, 이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포토저널리즘은 사각형의 프레임으로 현실을 반영해야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극적인 단면만을 선택하여 부각시킨다. 그것이 지닌 성격으로 독자들은 감동과 충격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소통도구로서의 포토저널리즘은 보도에서 내용의 일부가 되며 문자와 함께 보도 매체의 사회적 가치와 동일한 준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 사진은 기사보다도 더 실감나고 강력한 호소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선다. 사진을 통해 어떤 주제가 쉽게 구체화되고 영상으로 전달받기에, 무엇보다도 독자가 쉽게 내용을 이해한다. 특히 현장을 증언하는 생생하고 거짓 없는 기록으로 대중에게 더 강한 현실감을 던져준다.

포토저널리즘은 현재의 중요한 사실들을 카메라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전달하는 과정을 일컫는 말로, 과거 보도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신문에 나온 몇 장의 사진에서부터 현재는 신문, 잡지, 통신 등 정기적 간행물에 들어가는 사진을 일컫는 용어로써 포괄적 개념을 함유하고 있다. 예컨대 방송이라는 개념이 뉴스, 드라마, 다큐멘터리, 음악 콘서트, 스포츠중계, 오락 등 많은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듯이 포토저널리즘 안에도 스폿뉴스, 제너럴뉴스, 피쳐, 포트레이트, 스토리, 스포츠,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다큐드라마, 픽토리얼, 자연, 과학 등등 다양한 장르의 사진들이 있다.

보도사진(報道寫眞)은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인 1934년 일본인평론가 이나 노부오에 의해 보도의 ‘보(報)는 널리 알린다’, 도(道)는 ‘언어로 이끈다’는 뜻으로 보도(報道)는 ‘알리는 동시에 지도한다’는 뜻이다. 그는 또한 사진이 국제성이 강하며 의도적으로 이용한다면 정치, 군사, 경제, 당파적인 선전에도 강력한 무기이자 이데올로기형성의 강력한 힘으로도 이용 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로, 무지몽매한 국민을 선도 계몽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던 용어이다.

필자가 20여 년 전 현장에서 사진기자를 시작했을 당시에는 사진이 설명적으로 국민학생(황국신민의 학생) 아니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요구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위해서라도 잘못 사용되는 용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보도사진’은 서양에서 사용하던 정보제공기능의 신문의 역할과는 사뭇 다를 뿐 더러 개념에도 상당부분 상이한 점이 많아 경성대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다. 아마도 이러한 내용을 아는 이는 흔치 않은듯하다.

세계적인 명성의 퓰리처상, 월드프레스포토, 올해의 사진상 등 이미 유수한 외국의 포토저널리즘세계에서 익숙하지만, 작년 한해 국내 최고의 관람객을 동원한 사진전이었던 앙리카르티에 브레송 역시 포토저널리스트였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관람객으로 붐비는 퓰리처사진전이나 월드프레스포토사진전에서 왜 많은 이들은 이런 사진을 예술의 극치라고 칭송했던가? 현대 유명사진가의 난해한 사진보다는 훨씬 일반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증인이며 역사이기 때문이다.

흔히 국내신문지면에 게재된 사진이 너무 설명적이라 감흥을 받을 수 없고, 결국 오랫동안 기억에 남지 않는 단순한 상황전달사진이라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기자들이 독자들의 함축의미 해석능력을 과소평가하여 나온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혹은 사건을 단순히 보도하는 시각적인 수단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한 장의 사진 안에 내재된 메시지로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기억에 남는 감동 또한 동반한다. 좋은 사진이란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랜 기간 동안 기억에 남아, 보고 또 보고 싶은 사진일 것이다. 사진은 이성에 의해 자극 받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움직이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진실 또한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사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진솔한 자기감정의 표현이고 이것을 시각화 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을 만드는 접근방법인 것이다. 누구나 사진은 찍을 수 있으나 아무나 좋은 사진을 찍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승환 /경성대 사진학

 

 

필자는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거쳐 경성대 사진학과 교수로 포토저널리즘, 영상커뮤니케이션, 영상이미지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 경성대 미술관장 및 문화기획부장, 조선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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