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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풍경]늦가을, 서가에서 만난 한국미술서들
[책들의풍경]늦가을, 서가에서 만난 한국미술서들
  • 교수신문
  • 승인 2000.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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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5 13:32:22
18세기 우리 그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성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의 책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대원사 刊), 정병모 경주대 교수의 ‘한국의 풍속화’(한길사 刊) 그리고 허유 한서대 교수의 ‘동양화산책’(다빈치 刊)을 한데 묶는 특별한 키워드는 없다. ‘한국화’라고 말한다면 너무 일반적일 뿐만 아니라, 저자들의 명료한 생각이 가 닿는 곳을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지만 이 책들은 서로들에게 이르는 아득한 迷路를 열어 두고 있는 것 같다.

친절한 안내자 ‘동양화 산책’

‘동양화산책’ 앞에는 ‘마음으로 거니는’ 이라는 수식이 놓여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옛그림’(이동주, 1995),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이동주, 1996)과 같은 산책자의 넉넉한 시선을 경험한 독자들이라면 이 ‘마음으로 거니는’ 동양화 산책은 덤덤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림이란 무엇인가, 동양화의 이모저모, 붓과 먹의 쓰임새, 동양화의 정신과 사상, 창작과 모방, 그림에 관한 문제들이 책의 얼개를 이루었지만 정작 저자 자신의 뚜렷한 畵論이나 사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동양화’의 세계를 마음이라는 우주가 거니는 공간으로 생각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동양화의 세계로 안내하려는 ‘친절한’ 자세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는 게 정확할 듯하다.

‘한국의 풍속화’는 사정이 다르다. 학위논문을 근간으로 했다는 사정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가 포착하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이 뚜렷하게 느껴지며, 논쟁적인 성격까지 띠고 있어서다. 일찍이 18세기의 일급 비평가였던 강세황이 ‘豹庵遺稿’의 ‘檀園記又一本’에서 김홍도의 풍속화를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던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400년 동안에 파천황적 솜씨라 하여도 가할 것이다. 더욱 풍속을 그리는 데 능하여 인간의 일상생활과 길거리·나루터·점포·가게·과거장면·놀이마당 같은 것도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김홍도의 풍속화가 바로 이것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신비한 깨달음이 있어서 천고의 오묘한 터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랴!”

‘파천황적인 솜씨’와 ‘인간의 생활’에 당대 비평가 강세황의 시선이 가닿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풍속화’의 저자 역시 18세기 당대 화풍의 변화에 주목했다. 그 동안 풍속화에 대한 연구가 18세기 이후의 풍속화만으로 제한되거나 통시적 일별로 그쳤다고 한다면, 저자는 이 책에서 신앙-정치-통속 및 생활 부문의 관계를 통해서 풍속화의 성격을 탐구했다. 그 결과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으로 대표되는 18세기 풍속화는 통속적인 풍속화로 이전의 신앙이나 정치적인 풍속화와 구별하여 ‘근대적 성격’을 지닌, 한국 근대미술의 광대한 수로임을 밝혀냈다. 예컨대 저자는 1795년 ‘용주사 부모은중경’을 분석하면서, ‘조용한 반란’이 일어났다고 예의주시했다. 부처가 오체투지한 점에서 의식의 전환을 평가했고, 구도·등장인물·표현방식 등에서 ‘원근에 의한 공간감이 심화되는 등 회화적인 면모의 변화’를 읽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징후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사대부들이 통속의 세계를 수용한다는 것은 서민생활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을 시사하는데…통속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는 하류계층의 솟구치는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탈이념적이고 탈권위적인 통속화의 성행에서 중세와 근대의 경계를 찾았다는 점에서 저자의 작업은 논쟁적이긴 하지만 설득력있는 시각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속성을 상승하는 계급의 요구로 파악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시각이 놓치는 대목, 즉 정치권력의 미시적 지배라는 차원에 대한 검토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성급한 ‘환원론’으로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성미 교수의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은 저자의 연구논문인 ‘조선시대 후기 화론에 미친 서양화법의 영향’(1997)을 확장, 개고하여 출간한 것이다. 17∼18세기 중국을 거쳐간 이탈리아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서양의 입체적인 선원근법과 명암화법 등은 당대 조선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청나라 수도에 세워진 천주교회의 벽에 그려진 바로크 성화의 사실적인 표현은 조선사신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이덕무는 “벽에 그려진 큰 개가 물려고 덤비는 것 같아 무서웠다”고 했으며, 박지원은 “천장에 그려진 생생한 천사들을 보고 사람들은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고 기록을 남겨, 그 충격을 전하고 있다.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을 이루는 ‘개성시가’나 ‘대흥사’ 장면, 김홍도와 강세황의 합작품으로 알려진 ‘송하맹호도’나 변상벽의 ‘묘작도’, 작자미상의 ‘맹견도’ 등은 서양화풍의 영향을 반영한 대표적 작품. 인물화·영모화·산수화·기록화 등에 나타난 원근법과 채색구도의 변화를 통해 서양화법의 영향을 분석하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한편으로는 중국을 통해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사실감이 뛰어난 서양화법을 수용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자신들의 고유 화법에서 좀더 진실한 자기표현 방법, 즉 寫意를 찾으려는 방향으로 되돌아 갔다.”

“그림 속 실재는 현재와 어떻게 만나는가”

개스턴 해리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기억하자. “중요한 것은 그림이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재현이라는 버팀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재현은 오히려 관찰자를 그가 너무나 친숙해져 버린 세계에로 되돌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친숙함이라는 이 베일은 실재를 계속 은폐해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통해 우리가 읽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은폐된 ‘실재’를 발견함으로써 ‘한국의 풍속화’는 그것이 근대의 경계에 위치한 세계임을 밝혀냈다.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은 은폐된 실재를 표현하려는 당대의 정신을 복각해냈다. ‘동양화 산책’은 그런 실재들 사이로 한없이 미끄러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림 속에서 은폐된 ‘실재’는 어떻게 현재와 만나는가,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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