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22:20 (화)
[딸깍발이]서산을 벌겋게?
[딸깍발이]서산을 벌겋게?
  • 교수신문
  • 승인 2001.09.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9-10 00:00:00
이기홍/편집기획위원 강원대

단어의 뜻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변화하는 모양이다. 예컨대 나는 ‘獵奇’라는 단어가 살벌하게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것을 가리킨다고 알고 있는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귀엽게 특이한 것을 가리켜 쓰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발음이 유사한 일본말의 차용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이점을 의식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단어 하나의 의미 변화에 민감할 까닭이 있느냐고 대범하게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면서 또한 사유를 담는 그릇이라는 분석을 생각하면, 이 작은 변화에서 또 다른 사회와 사유 형성의 단초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또 더 나아가면 새롭게 형성되는 사회나 사유와 기존의 사회나 사유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도 있다. 아마도 당장 힘의 관계에서는 기존의 사회와 사유가 우위에 있겠지만, ‘시간’이라는 무서운 심판은 머지않아 젊은 사람들이 새롭게 형성하는 사회와 사유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中庸’이나 ‘順理’라는 단어도 기존의 것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나라의 권력구조에서 미묘하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老政客의 풀이에 따르면 중용이란 모가 나지 않는 것이다. ‘중용’이 사서에 속하는 책의 제목일 만큼 道와 理를 담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을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모가 나지 않는 것만으로 중용일 수는 없을 터이다.

하기야, 그 老政客은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40년전의 쿠데타를 제외하면 지금껏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나지 않은 삶을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유신본당의 2인자로 살아온 3공화국 이전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나라 민주화의 진전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국면에서도 ‘봄은 왔지만 봄같지 않다(春來不似春)’며 모나지 않게 웅크림으로써 오늘까지 작은 욕과 큰 영화를 함께 누리며 살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지역분열’을 볼모로 ‘몽니’를 무기로 펼쳐온 의뭉스런 줄타기의 역정으로 특징짓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그런 노정객이 마침내 ‘大望’을 논하면서 그것이 국민의 바램이고 역사의 순리라고 억지쓰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단어의 뜻의 변화에 대범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역 분열을 고착시키며 역사를 30년 이상 정체시킨 그 정객의 권력 장악이 ‘순리’라면 역사의 순조로운 이치는 정체란 말인가. 또 이런 이치를 공유하고 지키는 사람들이 형성하는 사회와 사유는 어떤 것이란 말인가.

워낙 의뭉스럽고 노회하며 온갖 풍상 속에서 오뚜기처럼 살아남은 정객이어서 그 속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으되, 얼룩진 정치상황에서 단연 돋보이는 근래의 그의 행보는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겠다’던 얼마전의 공언에 손색이 없다. 물론 그 벌건 황혼이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새아침의 여명은 언제나 동트려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