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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성③ 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 라이너스 폴링
세계의 지성③ 화학자이자 평화운동가 라이너스 폴링
  • 김명진 성공회대 강사
  • 승인 2006.12.07 18: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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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결합의 본질 규명 … 핵실험 반대엔 행동으로

 

ㅁ1961년 라이너스 폴링은 미국의 핵실험 재개에 강력히 항의하며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과학자들은 대체로 ‘정치’를 멀리하(는 것처럼 보이)려 애쓴다. 이는 과학자들이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통상의 의미에서의 ‘정치’와 거리를 두려 한다는 말이다.

과학자들이 하나의 세력으로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직접 제도정치권에 참여하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며, 그런 과학자가 나타날 경우 이 사람은 과학계 내에서 순수한 과학의 이미지를 ‘오염’시키는 인물로 배척되는 것이 보통이다.

더 나아가 과학자가 실험실을 벗어나 반핵운동이나 환경운동 같은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더욱 보기 힘든 일이다. 이는 상당한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하기도 할 뿐 더러, 종종 주류 입장을 벗어나 특정한 과학적 견해를 지지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과학계로부터 ‘괴짜’로 배척받는 정도가 훨씬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노벨상 받은 과학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 1901~1994)은 노벨상을 받은 ‘성공’한 과학자였으면서, 동시에 갖은 역풍을 헤치고 핵무기에 반대하는 정치 활동을 정력적으로 펼친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폴링은 1925년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화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그는 유럽으로 건너가 당시 물리학계를 휩쓸고 있던 양자역학적 접근방법을 터득했고, 이를 원자들 사이의 화학결합을 설명하는 데 적용하려 애썼다.

1927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칼텍에 자리를 잡은 폴링은 이내 화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30년대부터 그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X선 결정학의 성과를 합쳐 화학결합의 본질을 규명하는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특히 분자 구조의 규명에서 엄밀한 수학적 증명을 포함하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직관적 접근방식을 고안해 내었다.

그는 화학결합에 관한 일련의 연구 성과를 요약해 1939년에 ‘화학결합의 본질 The Nature of Chemical Bond’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있는 화학 서적이자 20세기에 가장 많이 인용된 과학책 중 한 권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화학결합의 본질에 대한 연구와 이를 복잡한 물질 구조의 규명에 적용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4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1970년대 중반에 영국의 과학 전문지인 ‘뉴 사이언티스트’가 뽑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20인의 과학자’에 뉴튼,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폴링의 화려한 경력에 오르막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생명체를 구성하는 분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51년에는 동료인 로버트 코리 등과 함께 단백질의 구조에 관한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해 다시금 전 세계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생명 현상의 비밀을 담은 DNA의 분자구조를 규명하는 과정에서는 몇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함으로써 결국 1953년 초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이중나선 구조 발견의 영예를 넘겨주고 말았다. 이는 폴링의 학자적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힌 사건이었다.

하지만 평화운동가로서 폴링의 활동은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는 2차대전 직후 아인슈타인이 의장을 맡았던 원자과학자 비상위원회에 가입해 전쟁 반대와 핵무기의 위협이 상존하는 미래에 대한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폴링의 정치적 활동은 1954년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특히 낙진의 위험성에 대해 우려했던 그는 1957년에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과학자들에게 핵실험 중지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고, 불과 몇 달만에 9천 명이 넘는 과학자들의 서명을 모아 추가적인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폴링은 원자에너지위원회에 대한 소송 제기와 ‘워싱턴 포스트’ 광고 게재 등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했는데, 심지어 그는 1961년에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해 케네디 대통령이 마련한 백악관 만찬에 참석한 전날에도 백악관 앞에서 “케네디 씨, 우리는 핵실험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했다.

폴링의 정치적 활동은 낙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일련의 과학 논문의 발표와 병행해서 이루어졌다. 그는 낙진에서 가장 위험한 방사성 핵종은 스트론튬-90이라는 당시 과학계의 주류 견해에 맞서 핵실험에서 나오는 탄소-14가 공공보건에 더욱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문을 1958년 가을에 발표해 대중적 주목을 끌었다. 이어 그는 낙진에서 나타나는 저준위 방사능이 일정 수준 이하일 때는 아무런 피해도 생기지 않는다는 이른바 ‘문턱값’ 가설을 비판하면서 낙진으로 인한 배경 방사선량의 증가가 이미 수만 명의 기형아 출산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폴링의 주장은 저준위 방사능의 위험성을 둘러싼 불확실성(현재까지도 완전히 규명되지 못한) 때문에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는데, 이 문제로 그는 공개석상에서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와 일련의 설전을 펼치기도 했다.

미·소 ‘제한핵실험금지조약’ 이끌어 내

폴링의 활동에는 엄청난 대가가 뒤따랐다. 1950년대의 매카시 선풍 속에서 많은 동료 과학자를 포함한 상당수 미국인들은 폴링이 공산주의자이거나 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치 활동을 그만두라는 칼텍 당국의 압력도 거셌다.

FBI는 폴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국무성은 해외 여행에 필요한 그의 여권을 취소했으며, 상원 의회는 폴링을 청문회에 출석시켜 반미국적 행위 여부에 대해 캐묻는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폴링은 이 모든 압력에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고, 결국 1963년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제한핵실험금지조약 ― 대기중, 바다속, 우주공간에서의 핵실험을 금지하고 오직 지하 핵실험만을 허용하는 ― 이 체결되면서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폴링은 196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데, 이로써 그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단독으로 수상한 역사상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폴링은 노벨 평화상 수상 직후 칼텍을 떠나 민주주의제도연구센터(CSDI)와 스탠포드대학에 잠시 머물렀다가 1973년에 ‘라이너스 폴링 과학과 의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대체의료에 관한 연구를 했다. 특히 그는 비타민 C의 대량투여(megadose, 매일 1그램 이상)가 감기를 예방하고 더 나아가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주류 의학계와 첨예한 마찰을 빚었다. 그는 노망난 과학자, 돌팔이, 괴짜, 비타민 산업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현재까지도 비타민 C의 효능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폴링의 역동적이면서도 굴곡 많은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과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반열에 오른 엘리트 과학자였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자신의 지위를 바탕으로 전쟁 반대와 핵무기 철폐라는 숭고한 대의를 위해 열정을 불사른 참여적 지식인이었다. 폴링의 경력은 비록 과학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지만, 과학자로서의 삶과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이 반드시 서로 모순될 필요가 없으며 한 개인 속에서 때때로 갈등하면서 공존할 수 있음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 폴링에 관한 저작들 무엇이 있나

헤이거 저서 가장 훌륭한 평전

라이너스 폴링은 비교적 최근에 사망했고 관련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나온 서너 종의 폴링 전기 중 Ted Goertzel와 Ben Goertzel의  ‘Linus Pauling: A Life in Science and Politics’와 Thomas Hager의 ‘Force of Nature: The Life of Linis Pauling’이 좋은 평을 받고 있는데, 특히 헤이거의 책이 가장 훌륭한 전기로 꼽힌다.

헤이거의 책을 청소년용으로 축약한 ‘Linus Pauling and the Chemistry of Life’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고문주 옮김, ‘화학 혁명과 폴링’, 바다출판사, 2003). 이 책을 통해 폴링이 개척한 독특한 과학 방법론과 폴링의 부인 Avan Helen이 그의 정치 활동에 미친 영향, 그리고 폴링과 여성 과학자 Dorothy Wrinch 사이의 날선 대립 등에 관한 사실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Clifford Mead와 Thomas Hager의 편저 ‘Linus Pauling: Scientist and Peacemaker’는 폴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책으로 폴링에 관한 지인들의 회고와 폴링 자신의 글, 그리고 수많은 자료 사진들을 담고 있다.

Evelleen Richards의 ‘Vitamin C and Cancer: Medicine and Politics?’는 비타민 C의 대량투여로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폴링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미 국립암연구소(NCI)의 후원으로 메이요 병원에서 진행된 두 차례의 임상시험 결과를 과학사회학적 시각에서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김명진 / 성공회대 강사·과학기술사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미국 기술사를 공부했다. 현재는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편저로 ‘대중과 과학기술’, 역서로 ‘인체 시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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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미연 2007-04-24 16:07:58
몇일전 뉴스에.........
애견 보신탕에 대해 보도하던데.
애견용 강아질 보신탕으로 쓴다더군요.
옛시절에는 먹을게 없어서 그랬다고 쳐도
지금처럼 먹을게 많은 시대에 꼭 그래야만 하는지
슬픈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