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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교수사회 :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③-도를 넘어선 논문심사 거마비
21세기를 위한 교수사회 :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③-도를 넘어선 논문심사 거마비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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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5:38:36

지난 97년 지방의 모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3년째 강사생활을 하고 있는 윤 아무개 강사는 박사학위 논문심사 과정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겁다. 서울과 인근지역의 대학에서 4명의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를 받았는데, 당초 예상보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게 소요됐기 때문이다. “다섯 분께 심사때 마다 20만원씩 드리고, 식사에 비행기 삯까지 챙기다 보니 거마비로만 3백만원 이상이 들어갔다. 여기다 논문 출판비에 이런 저런 잡비를 덧붙이니 5백만원 이상이란 적지 않은 돈이 소요됐다” 그래도 윤 강사는 호텔에서 논문을 심사받고, 적지 않은 접대비까지 준비해야 하는 일부 호화판 논문심사에 비하면 자신은 양호한 편이라고 자족한다.

대가와 성의사이의 아슬한 줄타기

학자로서 후학 양성만큼 보람있는 일도 드물다. 그 경중을 따질 것은 아니나 학문의 발전이 곧 인재의 재생산을 통해 이룩되는 것이라 할 때, 학자에 따라선 논문이나 저서를 몇 편 탈고하는 것 보다, 훌륭한 후학 한 명을 길러내는 것이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위논문심사는 후학에게는 학인의 길에 접어드는 첫 관문으로서, 스승에게는 후학의 연구성과를 검증할 수 있는 소통과 대화의 계기로서, 기쁨과 성찰의 시간이다.
하지만 학계 일각에서 관행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폐습은 이런 신성한 학위 논문심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도를 넘어선 車馬費. 뜻대로 풀자면, ‘교통비’로, 논문심사 과정에서 후학이 스승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준비하는 일종의 보답성 경비인 이 거마비가 요즈음 구설수에 자주 오르고 있다. 어디까지를 예우로, 어디까지를 대가로 잘라 판단하기 애매하지만 일부에서 들려오는 풍문은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서 학문 본연의 활동을 외면한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학과 분야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보통 박사학위 논문심사는 지도교수를 포함해 다섯 명의 교수에 의해 세번에 걸쳐 치러진다. 물론 각 대학은 공식적 심사비를 20만원에서 50만원 선에서 책정하고 있다. 이를 배분할 경우 심사위원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비용은 극히 미미하다. 더구나 대부분의 논문심사가 다른 대학의 교수들을 위촉해 이뤄지기 때문에 이 비용은 사실 교통비로도 부족한 금액이다. 때문에 심사를 받는 후학들로서는 또 하나의 ‘봉투’를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다. 이때의 거마비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닌 교수들의 노고에 대한 실경비 지원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도를 지나쳐 대가성의 경향을 띠는 데 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김 아무개 강사는 “공식심사비를 제외하고도 ‘거마비’란 명목으로 비공식 심사비가 학문분야별로 암암리에 책정돼 있다. 우리 학과만 하더라도 한번 심사에 한분께 20만원, 전체적으로 3백만원 정도를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전한다. 후학들은 이를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비용이라는 점에서 흔히 ‘공시가격’이라 부른다. 이 공시가격은 지방대학으로 갈수록 높아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이 모종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는 데 있다. 원칙대로라면 논문 심사위원은 그 대상자가 정해야 하지만, 인맥이 두텁지 못한 후학들로서는 대부분 지도교수의 추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학문분야별로 절친한 학자간에 주고받기식 논문 심사가 이뤄지면서 관행이 관행을 낳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런 구조에선 ‘받았으니 줘야 한다’는 관례가 굳어지기 때문에 그 굴레를 벗기란 싶지 않다.
도를 넘어선 거마비의 관행은 후학들에게 경제적 안겨주는 점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비록 선의일지라도 논문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이뤄질 수 없게 한다는 점은 부차적이다. 더 큰 문제는 비록 적은 돈일지라도 학문외적인 부분이 논문의 질을 대신하는 그릇된 폐습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김동윤 건국대 교수(불어불문학과)는 “외국대학에서는 이 같은 관습을 찾아볼 수 없다. 수년간의 노력과 열정의 결과물인 후학의 학위논문을 돈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마비는 분명 사라져야할 관습”이라고 꼬집었다.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과)도 “향응과 뇌물의 성격을 띠고 있는 거마비는 비리의 성격이 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는 학계의 한켠에서 진행되고 있는 관행이란 점이다. 이미 고유의 진지한 논문심사 풍토를 마련하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성균관대의 경우 몇 해 전부터 35만원이던 공식심사비를 70만원으로 현실화했다. 서울대도 일부 학과를 중심으로 논문 심사단계를 줄이고, 공식적인 심사이외에 다른 비용을 받지 못하도록 보완했다. 또한 연세대 사회학과의 경우 공식심사비 이외의 대가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풍토를 조성해 왔다. 중앙대 경제학과와 정치외교학과에선 공식심사비 조차 교수들이 직접 부담하고 있다. 이와 관련 권순긍 세명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논문심사를 마친 후 준비한 봉투를 심사교수님들에게 건넸는데, 후에 이를 되돌려 주셨다”며 “큰 액수가 아니었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스승의 배려는 학인의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큰 교훈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공식심사비 현실화 필요

하지만 후학들은 거마비가 없으면 없는 대로 껄끄로운 면이 없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박원재 고려대 강사(철학)는 “공식적 논문심사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조금의 성의 표시는 필요하다”며 “문제는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제도에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대의 최 아무개 강사도 “거마비의 폐단은 음성화되고 있는데 있다. 오히려 그 비용을 공개화 하면 도를 넘는 관행은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어차피 불가피한 것이라면 투명화·공개화 하는 것이 오히려 잡음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대학의 공식적 심사비를 현실화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안길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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