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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대학 CEO총장의 빛과 그림자
[교수논평]대학 CEO총장의 빛과 그림자
  • 홍승용 대구대 독문학
  • 승인 2006.11.25 0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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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대구대 독문학과 교수.
최근에 불거진 CEO총장의 의의에 대한 논란은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거의 모든 사회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입장들이 병존하고 있다. 우선 잘나가는 대기업 총수들을 선망하듯 CEO총장에게서 꽤 많은 것을 기대하는 시선이 있다.

반면에 이러한 시선 자체를 자본주의체제의 지식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난관의 한 징후로 보는 눈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CEO총장들은 수천억 원의 발전기금을 모아 건물들을 깔끔하게 리모델링하기도 했고, 자기 대학의 서열을 제법 높여 놓기도 했으며, 학교를 빚더미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흔히 ‘CEO총장’이라는 말은 거의 자동으로 경영마인드, 경쟁력 강화, 우수학생유치, 비인기학과 통폐합, 대학평가와 서열 등등 이 시대 교육관료주의의 주류 어휘들과 결합된다. 종종 개혁이라는 상투어까지 그것들과 뒤섞여 욕볼 때도 있다. 그러한 어휘들이 의미하는 실제 상황은 누군가에게 신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대학의 존재이유를 의심케 하는 문제 상황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대학에서 총장의 권한은 막강하다. 학교 전체의 재정과 교직원 인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학교의 성격을 상당정도 규정할 수도 있다. 그러한 역할은 흔히 봉사의 노고 이상으로 권력의 단맛으로 비쳐질 것이다. 최소한 총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권력의 단맛을 즐기는 총장들의 경영 마인드는 단기적 성과에 집중되기 쉽다. 재임 중에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번쩍거려야 재선도 약속될 것이다. 이러한 조급증은 무리한 업무추진으로 나타나곤 한다. 무자비한 경영 마인드로 무장된 총장들은 성과주의에 홀려 자신을 채찍질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 전체를 자신의 경영논리 속에 가둬두고 싶어 한다. 이 경우 겉보기 좋은 CEO총장체제의 수많은 내부 구성원들이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그러한 압박은 쉽사리 구성원들의 원초적 생존본능에도 뿌리를 내린다. 경쟁에서 한발 앞서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대학구성원들의 천성으로 자리 잡고 학벌적 패권주의로까지 발전해갈 때 CEO총장의 활약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의 존재이유를 따질 겨를이 없다. 무엇을 위해 살아남아야 하는지, 왜 자꾸 경영규모를 키워나가야 하는지, 그렇게 키워진 외형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이론이 나왔고 시대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어떤 지식인들이 어떻게 양성되었는지 묻는 것은 극소수 배부른 인문학자들의 사치스러운 딴죽걸이쯤으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예컨대 이 시대의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나 전쟁 위기를 비롯한 범인류적 근본문제에 대학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은 결코 사치일 수 없다. 성장과 분배의 최적비율에 대한 논의는 정치권과 재계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첨단 과학기술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할지 인류를 공멸로 몰아갈지 이해하는 데에는 인문학적 판단력이 필수적이다. 대학은 자본과 정치권력이 당장 요구하는 지식들만 아니라 그 요구들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지식을 생산할 사회적 책임도 떠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CEO총장을 중심에 두는 개념틀로는 이러한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수준급의 CEO총장이라면 “나는 발전기금 모아서 낡은 건물들 리모델링하고 연구비 넉넉히 마련할 터이니, 당신들은 그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자율적으로 열심히 고민하시라”는 자세를 취할 만도 하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행복하게 진행되는 사례는 드물다. 쓸데없는 것들 연구하고 가르쳐서 고등실업자나 배출하고 세상 시끄럽게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손님 없는 학과 문 닫고 변신 연습이나 열심히 하라고 을러대기 일쑤다.

이 또한 지식인들 내부의 호응 없이는 잘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학문의 존재이유에 대해, 예컨대 한국에서 독문학처럼 인기 없는 분야가 존재해야 할 역사적 사회적 이유에 대해 괴롭게 반성하기보다는, 같은 내용을 어떻게 포장해야 손님이 모이고 최소한 밥줄이라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지 머리 쥐어짜기 바쁜 분위기가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해왔다. 대학인들 스스로 대학을 시장판으로 만들어온 셈이다. 이런 분위기가 대학가를 주도하는 한에서 CEO 총장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느 대학이 얼마의 기금을 모았고 교수들의 연봉이나 연구비가 얼마인지보다, 누가 어떤 이론을 만들어내고 학생들이 어떤 사고방식과 능력을 갖추어가고 있는지에 더 관심 있다. 재벌 돈으로 무슨 현대식 건물 한 채 올리는 것이 부러워 보이기는커녕, 재벌총수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하는 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인문학 교수들의 처지가 애처로웠다. 그리고 대학사회가 이론적 해방적 관심보다 경영적 패권적 욕망에 끌려 다니고 있는 대세를 바꾸지 못하고 있어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주저앉아 있을 생각은 없다.

홍승용 대구대·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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