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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인정됐다 … ‘감각인식=존재론’은 비약일 뿐
것’은 인정됐다 … ‘감각인식=존재론’은 비약일 뿐
  • 정재현 제주대
  • 승인 2006.11.24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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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반론]손영식 교수(교수신문 417호)에 대한 두 번째 반론

손영식 교수는 필자의 반론에 대해 재반론의 글을 보내 주셨다. 교수신문에 실린 것과 별도로 필자에게 장문의 비평도 보내주셨다. 감사드린다.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공손룡과 혜시의 몇 가지 명제들에 대한 손 교수의 해석과 필자의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해 상호 비교해 제시하려 한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 점만 다룬다.

먼저 공손룡의 堅白論이 버클리 류의 관념론을 의미한다는 손 교수의 주장을 논증형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공손룡은 ‘딱딱함’과 ‘하얌’이 분리된다고 한다. △‘딱딱함’과 ‘하얌’이 분리된다는 것은 ‘딱딱한 것’, ‘하얀 것’에서 ‘것’을 부정했다는 말이다. △ 따라서 공손룡은 우리에게 인식 혹은 감각되는 속성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실체나 본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공손룡의 離堅白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공손룡은 ‘딱딱한 것’은 촉각을 통해 파악되고, ‘하얀 것’은 시각을 통해 파악된다고 했다. △ 공손룡의 리견백은 ‘딱딱한 것’과 ‘하얀 것’이 인식론적으로 분리(구분)된다는 것이다.

필자와 손 교수의 해석에서 다른 것 중 하나는 필자는 ‘딱딱함’이란 말보다는 ‘딱딱한 것’, ‘하얌’보다는 ‘하얀 것’이란 표현을 번역어로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필자가 굳이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딱딱함’과 ‘딱딱한 것’ 혹은 ‘하얌’과 ‘하얀 것’이 堅이나 白이라는 고전중국어에 대한 번역어로 같이 쓰일 수 있고, 따라서 고대의 중국인들에게선 속성과 실체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치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다.

또한 이를 통해 실체의 의미로선 아니지만, 공손룡에게서 ‘것’이 부정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다. 필자의 이런 번역은 하나의 堅白石을 堅, 白, 石의 셋이라 할 수 없고, 堅과 石, 혹은 白과 石의 둘로 봐야한다는 공손룡의 언급에 의해서도 옹호된다.

필자와 손 교수 해석의 또 다른 차이는 딱딱함과 하얌의 분리를 필자는 인식론적 혹은 의미론적으로만 인정하는데, 손 교수는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손룡이 리견백의 근거로 든 것은 주로 속성들에 대한 감각인식의 상이성이었는데, 어디서 이런 속성들만의 존재론이 결론으로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손 교수처럼 속성과 실체의 구분이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어서 고대 중국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아니 백보양보해서 실제로 있었다 해도(‘있을 수 있다’는 것과 ‘있었다’는 것은 다르다), 우린 인식론적 관점을 취함으로써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서도 얼마든지 ‘딱딱함’과 ‘하얌’이 구분된다는 공손룡의 주장을 무리 없이 해석해 낼 수 있으므로, 손 교수의 존재론적 해석은 해석의 경제성에 비춰 봐도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인식론적 해석에 따른 공손룡의 주장은 굉장히 상식적인 주장인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의 희고 하얀 돌(견백석)을 당연히 하나로만 인식하는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인식론적) 관점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주장이다.

혜시의 주장이 다세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는 손 교수의 주장을 논증으로 전개하면 다음과 같다. △ 혜시는, 연나라의 북쪽이며 월나라의 남쪽인 곳이 천하의 중앙이라고 한다. △ 중앙은 하나의 점이므로,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을 지름으로 하는 거대한 원형의 지역도 하나의 점으로 볼 수 있다. △ 혜시와 관련 있는 변자들은 한자 길이의 채찍을 날마다 잘라서 그 반을 취해서, 만대에 이르더라도 채찍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 이것은 무한히 작은 것도 결국은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무한히 큰 것도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는 존재 #2와 무한히 작은 것도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는 존재 #0, 그리고 일상세계를 인식하는 존재 #1 등을 포함하는 다세계를 혜시가 인정했다고 해야 한다.

그에 비해 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 천하의 중앙을 흔히 연나라의 남쪽과 월나라의 북쪽 사이의 어느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연나라의 북쪽에 있을 수도 있고, 월나라의 남쪽에 있을 수도 있다. △ 연결된 고리의 어떤 부분도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어느 곳도 중앙이 될 수 있다. △ 혜시계열의 변자들은 한자길이의 채찍을 날마다 잘라서 그 반을 취해서, 만대에 이르더라도 채찍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 이것은 무한히 작아진 것도 결국은 하나의 (상대적)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안이 없는 小一의 관점, 즉 절대적 무한에서 보자면 무한히 작아진 채찍도 하나의 상대적 존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제세계의 아무리 큰 것도 밖이 없는 大一의 관점, 즉 절대적 무한에서 보면 하나의 상대적 존재일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대일과 소일을 각각 절대적으로 큰 것과 절대적으로 작은 것으로 보고, 즉 무한으로 보고, 이를 기준으로 해서 그 밖의 것은 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임을 혜시가 주장한다고 생각하는데, 손 교수는 대일과 소일을 하나의 상대적 ‘사건의 지평들’(?)로 해석해서, 우리에게는 소일이고 대일이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소일인 것을 소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 #0이 있고, 우리에게는 대일이지만 그것을 대일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 #2가 있음을 혜시가 그의 역설들을 통해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필자는 소일과 대일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손 교수는 상대적이라 생각한다.

정재현 / 제주대·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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