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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으로의 초대] 五方情色으로 유럽화단에 우뚝 선 오승윤 화백
[지면으로의 초대] 五方情色으로 유럽화단에 우뚝 선 오승윤 화백
  • 교수신문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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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9 13:58:24
흘깃 사발을 보고 원을 그린다. 동그랗게 그린 원 위에 사발을 뒤집어 크기를 비교한다. 그려놓은 동그라미와 사발의 원주가 정확히 일치될 때까지 반복해야 했던 이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은 근대 중국의 화가 지망생들이 스승으로부터 받아야 했던 기초적인 훈련이다. 수천, 수만번의 붓질을 통해 사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능력을 기르는 이 수업은 기본적인 회화능력을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렇듯 기본을 익히는 시간은 대체로 재미가 없기 마련이다.

올해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 유럽 4개국에서 순회전을 갖고 있는 오승윤 화백이 삶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화가는 기초적인 표현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몇몇 젊은 작가들이 기본에 소홀한 채 자극적인 것만 찾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꼬집는 데에는 ‘기본’에 관련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오화백은 우리 전통의 색채배열 방식인 오방정색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등 세계 미술의 중심지에 ‘자극’을 주기까지 기나긴 과정을 쌓아왔던 것이다.

오화백은 6회에 걸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으며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를 지낸 우리 화단의 중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는 지나간 시간들을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지금까지 변변한 화집이 하나 없다. 처음부터 내 것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환갑이 넘어서야 나의 그림을 찾은 듯해서 이제 하나쯤 화집을 출판할 생각이다.” 자기 그림을 기어코 찾아 새로운 세계를 연 우리 시대의 한 화가는 무엇이든 빨리 이루려는 속성의 시대와는 멀리 빗겨있다. 어떤 이들은 시대의 급류에 초연한 현재의 모습에 대해 일가를 이룬 사람의 여유가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화백은 화가수업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시절부터 유행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화백이 홍익대 미대에 입학한 1960년은 화단이 추상미술의 물결에 잠겼던 시절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오화백은 우리의 풍광을 구상화로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버님인 故 오지호 선생의 신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비구상미술은 회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오지호 선생은 인상주의 화풍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우리 화단의 거목. 그러나 오화백이 추상미술의 물살 속에서도 구상에 초점을 맞추었던 진정한 이유는 고집스러운 예술혼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삶의 굴곡이 모두 ‘그림’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 지게꾼, 리어카꾼, 베짜는 아낙 등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화폭에 옮기던 오화백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남해의 별’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1974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을 창설,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불만은 계속 쌓여갔다. “학생은 선생의 화풍을 배우고 선생은 학생들의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떠나지 않았다”. 1980년초 재충전을 위해 파리로 건너간 오화백은 아카데미 그랑스 쇼미에르 등 유명 미술관의 전시품을 감상하고 인체 그리기에 몰입했다. ‘그림’을 찾기 위해 자극과 연마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화백은 1983년 대학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연인으로서 10년 동안 오화백은 고전 작품을 구해 읽고 우리 땅을 종횡으로 누볐다. 프랑스에서 받은 자극이란 다름 아닌 서구예술에 대한 추수로는 그만의 그림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우리 색과 우리 산천이 내면에 차곡차곡 중첩될 때까지 고단한 발품을 팔았다. 그리고 나타난 작품이 오방색과 극도로 단순해진 도상이다. 반향은 폭발적이었다. 약 8만명이 관람했던 1993년 아르노 도트리브(Arnaud d’Hauterives)가 주관한 가을전람회의 한국관에서 오화백의 그림은 단연 주목을 끌었다. 이어 1996년 모나코 몬테카를로 전람회에서 특별상 수상, 피에르 가르댕 재단의 대표적인 전시회인 꾸드 꼬 살롱전에 2년 연속 초대되어 해외의 유명작가들과 대등한 반열에 올랐는가 하면, 피카소, 보나르 등 1급 작가의 작품만을 표지로 내세워 온 ‘위니베르 데자르’의 표지에 작품이 실리는 등, 해외 화단에서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역의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오화백은 올해도 유럽의 초대전들에 응하느라 분주하지만 그의 친구인 알랭 본느프와의 집에서 누드를 그리며 연마를 계속하는 중이다. “외국작가들의 경우 60세 전후에 신인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그림을 그릴 때 비로소 신인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오화백은 “이제 오방색을 이용한 풍수 시리즈도 변화시킬 때가 됐다”며 화실의 그림을 둘러본다. 다져온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또 다른 문을 발견이라도 할 것처럼.
<류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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