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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다시 보는 키신저의 외교정책
[문화비평] 다시 보는 키신저의 외교정책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6.11.16 1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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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의 중간선거가 있었다. 안도했다. 남의 나라 선거 결과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 자신이 참으로 안쓰럽다. 그러나 어쩌랴. 미국은 제국이다. 그런데 제국 맞나? 원래 제국이란 보편이다. 세계다. 외부란 없다. 그 너머에 누군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인간 세상과 무관하다. 로마제국이 그랬다. 그것은 세계의 전부요, 그렇게 보편이었다. 그 보편은 내적으로도 적용되는 원리였으니, 로마제국이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시민’은 모두가 평등했다. 지금의 미국은 제국인가? 아니다. 미국에게는 외부가 있다. 백 수십 개에 달하는 민족국가가 있다. 미국 역시 그들 중 하나다. 따라서 미국이 ‘세계’에 평등한 지위를 제공하지 않는 것도 지당한 노릇이다. 다만 미국이 제국으로서 행동하면서 민족국가로서의 이득을 챙기고, 그 위험과 손실은 다시금 ‘세계’에게 배분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만일 미국의 민주당이 다음 대선에서도 승리한다면, 미국의 국제정치는 제국으로부터 민족국가로 되돌아갈까? 돌아간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과거를 돌아보자.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이 세계의 박수를 받은 경우를 꼽으라면, 아마도 1970년대 데탕트이리라. 그 때 미국은 중국과 외교를 정상화했고, 소련과 핵무기 경쟁을 제한했다. 그 주역은 헨리 키신저였다. 키신저는 원래 서구의 외교사를 연구한 정치학자였고,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운 ‘현자’였다. 그는 19세기 전반기 유럽 외교를 주도한 메테르니히를 집중적으로 분석했고,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외교무대를 풍미했던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도 해박했다. 키신저가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상대국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외적인 행동에 따라 평가하라. 둘째, 절대적인 안보는 유토피아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상대방을 절대적으로 불안하게 만들 뿐이므로,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상대적인 안전이다. 셋째, 상대적인 안전은 ‘강대국’ 사이의 합리적인 세력균형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얼마나 탁월한 통찰인가!

그러나 키신저는 과거의 교훈들 밑에 ‘철학적’ 원리를 하나 깔아두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 그 자체였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카오스였다. 그가 보기에 그 카오스는 소련도 중국도 아닌 주변부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베트남과 아랍과 칠레와 앙골라가 그들이었다. 카오스에 대한 키신저의 대응은 수미일관했다. 한편으로는 우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하는 것이었다. 화해한 중국과 해빙한 소련을 통하여 힘을 빼는 것이 하나였다면, 직간접의 무력 개입을 통하여 제압하는 것이 다른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키신저는 그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중국과 소련에 대해서 그 ‘약소국’들이 보유하고 있던 현실적인 독립성을 과소평가한 것과, 그들의 독립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부시의 외교정책도 동일하다. 그는 한편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와 유럽을 다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간접의 무력 개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부시 역시 키신저처럼 여지없이 실패하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외교정책은 부시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되돌아보면서 붙잡을 컨셉은 그것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키신저의 그 철학적 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질서와 카오스라는 개념쌍 말이다. 폴란드와 영국을 오가면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서구 근대성의 원리를 질서에의 강박에서 찾았다. 질서는 인류가 문명을 건설한 이래 언제 어디서나 작동하는 구성 원리였다. 문명은 곧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질서가 지금 이곳의 속세에서 ‘완성’해야 할 ‘상상적 초점’으로 등장한 때는 서양 근대의 여명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상적 초점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질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무대로서 카오스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카오스는 질서의 구성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근대는 영원히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카오스를 내장한 채 질서를 향해 매진하는 근대는 영원히, “아직은 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국 대외정책에 적용해본다면, 키신저의 제3세계와 부시의 악의 축은 그들 외교정책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질서의 내부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카오스의 외부인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과 달리 포스트모던한 ‘제국’이 아니다. 미국은 모던한 ‘제국주의적’ 민족국가다. 약소 민족국가의 자유 의지는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해방적 도구이다.

김학이 동아대·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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