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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수사학' 그 지독한 裸身
'위기의 수사학' 그 지독한 裸身
  • 하상복 목포대
  • 승인 2006.11.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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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논평] 쏟아지는 386비판을 보면서
하상복 / 목포대·정치학

한국의 민주주의 형성에서 1980년대는 정치학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비교 민주주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democratic transition)이 이룩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직선제로 상징되는 한국 민주주의 실현의 중심에는 이른바 386세대가 있었다. 이렇게 보자면 386은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언어들 중의 하나가 될 법하다. 그러나 지금 386은 그러한 논의 자체가 무색할 정도로 너무나 부정적인 언어로 전락해 버렸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적 무능력과 무기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사실이다. 현 정부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386 측근 인사들이 그러한 정책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민주주의의 花冠을 써야 할 386들이 무능력, 무기력, 비도덕, 아마추어리즘과 같은 용어들을 통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음이 하나의 현실이다.

역시 386세대인 필자가 386에 대한 비판이 비전 없고 능력 없는 인간들로 마무리되길 바랐다면 그것은 과도한 욕심이었을까? 그들에게 또 하나의 부정적 의미가 덧씌워질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그들을 포박할 추가적 의미는 기존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가정보원은 재미교포인 고정간첩이 민주노동당의 간부들을 포함, 386 운동권 출신들을 포섭해 일심회를 만들어 대남 공작을 펼쳐왔다고 밝혔고 보수언론들은 이를 ‘386 간첩단 사건’으로 신속하게 규정해 버렸다. 주지하다시피 보수 세력과 보수언론이 사용해 오고 있는 용공, 좌경, 친북과 같은 언어들은 그 동안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해왔다. 모든 토론을 정지시키고 모든 주장을 무대 밖으로 던져버리는 힘이 아니었던가. 지난 1991년 봄에는 젊은이들의 분신조차 비윤리적인 정치적 전술로 폄하시키면서 정국을 급반전시키는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제 그들은 그 언어전술을 다시 사용하려 하고 있다.

보수언론이 앞 다투어 제목으로 뽑아 쓰고 있는 또는 기사의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하고 있는 ‘386 간첩단’은 그야말로 적은 힘으로 큰 정치적 효과를 낼 수 있는 ‘저비용 언어전략’으로 보인다. 이미 찢겨질 대로 찢겨진 386이란 언어가 맹목적인 분노와 적대감을 자극하는 간첩이라는 언어와 결합하면서 만들어내는 정치적 효과는 너무나 명백하다. 특히 현 정부의 정책과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지금의 간첩단 사건이 과연 386이 그 본질이 되는 사건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심회에 포섭된 사람들 대부분이 80년대 운동권에 속한 40대 인물들이기 때문에 386 간첩단 사건인가. 아니면 그들 모두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러한가. 사건이 발표된 지 단 하루 만에 386 간첩단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보도행태이고, 만약 사건이 그렇게 심각하다면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는가. 한 보수 신문의 10월 27일자 사설은 ‘노정권 친북기조와 386 간첩단’이란 제목 아래 ‘386 운동권’ 출신 3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같은 날 민주노동당 간부 2명을 체포했다고 말하고 있다. 5명의 386 운동권이 연루되었다고 해서 386 간첩단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일간지가 말하고 있듯이 서둘러 “386인사들이 연루된 대형 간첩사건이라는 틀에서 접근”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정치적 목적 이외에 다른 것을 떠올리기 어렵다.

보수언론은 잘 안다. 386은 이미 노무현 정부와 한 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용공, 좌익, 친북 주사파와 같이 적지 않은 국민들이 여전히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용어들로 386을 공격하면 그것은 곧 노무현 정부에 대한 공격인 것이고 386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흔드는 일은 다름 아닌 노무현 정부의 그것을 깎아내리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연유로 보수언론은 386 간첩단 사건을 다루면서 궁극적으로 정치권과 청와대의 386 역시 간첩세력에 포섭된 것은 아닌가, 친북 주사파가 정권의 실세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끊임없이 自問하고 있는 바이다. 너무 적나라하다. ‘집권 386에 ‘수박’ 얼마나 많은가‘라고 묻고 있다. 그들에게 이념적 고해성사를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필자의 눈에 그들의 문제제기는 객관적인 사태인식이라기보다는 현 정부의 이념적 불순성을 우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국민들을 향해 허쉬만(Alberto Hirschman)이 말하는 ‘위기의 수사학’(rhetoric of jeopardy)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째서 대한민국의 정치언어학은 지난 시절로부터 단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가. 근사한 정장을 입고 대화하는 모습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발 옷이라도 걸치고 떠들어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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