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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린은 ‘반계몽주의적’ 여우?
벌린은 ‘반계몽주의적’ 여우?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11.02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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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책]『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마크 릴라 외 지음)

이사야 벌린 1주기인 1998년 열린 한 추모학술대회에서는 벌린에 대한 학문적 평가는 물론이고 그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쏟아졌다. 이 책에는 당시 벌린의 철학적·정치적 주장들을 나누어 검토한 발표문과 토론문이 실려 있다.

이사야 벌린은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이원적 설명틀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며, ‘다원주의적 자유주의자’로 규정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다원주의자(여우)인가, 아니면 일원주의자(고슴도치)인가’를 놓고 논쟁한다. 마크 릴라 등은 벌린이 ‘여우’라는 데 입을 모은다. 특히 릴라는 “헤르더, 비코, 하만 같은 반계몽주의자들의 사상적 도움에 힙입은 여우”라고 꼬집는다. 이는 곧 벌린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욕망 때문에 반계몽주의적 주장이 제시하는 문화적 관점의 유용성을 지나치게 확신했다”는 게 그 이유다. 또 다른 학자군은 벌린의 이론들을 검토한다. 그의 가치다원주의가 지닌 이론적 강점과 약점은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도 토론자들은 비판의 끈을 놓지 않는데, 가령 로널드 드워킨은 “벌린의 ‘소극적’ 자유개념은 ‘잘못된 정의’ 방식으로 인해 다른 가치들(평등)과 충돌하게 돼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검토대상으로 올라간 것은 ‘벌린의 민족주의’다. 토론자들은 그가 학문적으로 민족주의에 접근했던 것과 유태인으로서 시온주의에 온정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을 문제삼는다. 하지만 그의 시온주의가 곧 다원주의적 입장과 모순되는 건 아니기에 “벌린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를 보여줬다”고 옹호되기도 한다. 이 책은 이처럼 비판적인 지적 토론들로 가득 차있지만, 그러나 모두 벌린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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