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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련된 이미지 속의 어떤 편향성
세련된 이미지 속의 어떤 편향성
  • 박평종 명지대
  • 승인 2006.10.31 2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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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구본창의 사진세계 (2) 현대한국사진의 흐름 속에서의 구본창

In The Begining #1 / 1991년 / Gelatin Silver Photographs, Cotton Thread
1980년대 중후반부터 약 20년간 구본창은 줄곧 한국 현대사진의 한 줄기를 이끌어 온 대표작가로 꼽힌다. 기존의 한국 사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형식과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은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적잖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8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이 보여주었던 편향성에서 기인한 바 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은 이미 완성되며, 이후에 개입하는 수작업은 사진의 본성을 해친다는 생각은 그 때까지의 한국 사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규범처럼 간주되고 있었다. 구본창이 추구했던 자의식의 표현이나 형식적 실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표현 방법은 이러한 규범에 비추어 보았을 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도였다. 하지만 형식에 경계를 부여해 왔던 관행은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수단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에게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사진은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진가들의 요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이 80년대 후반 이후 자유로운 사진 형식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사진세계 전체에 대한 일반의 평가에는 적지 않은 과장과 상투적인 찬사가 스며있다. 일관되게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나가는 작가에게 그러한 찬사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되었음직하다. 게다가 그 찬사는 작가의 사진세계에 대한 공정한 평가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유명작가를 원하는 일반 관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요식적인 행위에 가깝다.

초창기의 칼라 작업 ‘열 두 번의 한숨’과 ‘일분간의 독백’에서부터 ‘긴 오후의 미행’, ‘탈의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형식에 개의치 않고 자의식을 표현하는 데에 몰두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의 사진은 세간에 알려져 한국 ‘현대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일궈낸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자화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상의 소품들, 자연풍경, 거리모습, 도처에서 취합한 다양한 사물들을 모아 편집하여 전혀 새로운 낯선 이미지를 구성해 내는 이 작업들은 내밀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양한 이미지들을 병치하여 재구성한 이 사진들은 철저하게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어 작업을 지배하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독과 우울, 권태, 소외 등 작가 자신의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는 이 사진들에서 의미를 읽어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배타적 주관성과 자의식 과잉은 오히려 현대성이라는 이름과 맞물려 그의 사진세계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Good-bye Paradise-Blue #3 / 1993년 / C-print
9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형식적 실험은 계속된다. ‘무제’와 ‘포토그램’ 연작, ‘아! 대한민국’, ‘태초에’, ‘In the Beginning’, ‘Good Bye Paradise’와 같은 작업들은 관심이 투영되는 대상들만 바뀔 뿐 작업의 초점이 표현 형식의 확장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토그램과 콜라주, 혼합 재료, 각종 오브제는 물론 재봉기술, 상자까지 동원한 이 작업들에서 작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도입하는 데에 골몰했다. 하지만 이미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시도되어 온 형식들을 다시 사용하는 작가에게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선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이 작업들은 작가 자신에게는 습작과 같다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다양한 형식적 모방을 통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작업들은 원숙한 한 작가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이러한 사진들이 한국 현대사진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 왔다고 평가받는 현상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후 ‘숨’과 ‘Ocean’, ‘White’ 시리즈에서 작가는 형식 실험보다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사실 작업의 내용과 의미보다 형식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이 사진들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줄곧 그의 사진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존하여 세련된 이미지를 추출해 내는 그의 재능은 분명 뛰어나다. 하지만 조형성과 감각적 이미지에 탐닉하는 그의 작업에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작가의식이나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치열함은 부족하다. 한국 사진의 현대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가 감각적으로만 뛰어나다고 한다면 한국의 현대사진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독일 유학 이후 귀국하여 보여 준 그의 사진은 현대적이라는 이름 하에 한국 사진에 갑작스런 단절을 끌어들였다. 만약 그에게 8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다면 그의 사진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서양 사진에는 정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불균형한 감각 때문에 그가 끌어들인 단절의 골은 더욱 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서양 사진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물이라는 소리 없는 비난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백자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2006년 / Digitalized Print
계속해서 자기 갱신을 해 나가는 부지런함과 완벽을 추구하는 엄밀함을 같이 갖춘 작가가 이러한 비판 앞에서 태연자약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90년대 후반부터 작가는 한국적인 소재를 찾아 나서면서 그 동안 소홀히 해 왔던 ‘한국적인 사진’으로 관심을 돌린다. ‘탈’과 ‘백자’ 시리즈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오랜 연구를 병행한 끝에 나온 작업의 결과물이다. 피사체가 전통 문화와 관련된 대상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적어도 서양 모방이라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들이 작가의 위상에 걸맞은 온전한 지위를 얻어내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우선 그가 카메라를 통해 전통 문화를 해석하는 시각이 오히려 우리 문화에 대한 왜곡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한다. 작가는 우리 문화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있지만 해석의 형식은 기록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의 주관이란 무고한 것이지만 대상에 대한 존중은 주관이 줄어드는 데서 나온다. 전통문화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뛰어난 기록 작업과 비교할 때 그의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자유로운 해석과 가급적이면 대상에 충실하려는 태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의 작업이 전통문화에 대한 충실한 기록과는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 작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 사진은 큰 변화를 겪어왔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구본창이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났고 대상을 세련되게 꾸며내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일반 관객들이 그의 사진에 매혹당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기존의 규범 바깥으로 뛰쳐나가면서 작가는 한국사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지만 지나치게 감각과 세련된 형식을 중시한 나머지 한국의 현대사진에 또 다른 편향성을 끌어들였다. 현대를 이끄는 규범을 한두 가지로 축약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이 속을, 모양이 정신을 지배하는 모습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구본창이 기존의 규범에 도전하여 한국 현대사진의 지평을 넓힌 대표작가라는 평가는 일면 타당하지만 어떤 정신이 그 도전과 개척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꼼꼼히 살피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그것 없이 맹목적인 찬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박평종 / 명지대 한국사진사연구소

파리10대학 철학과에서 ‘역사적 오브제와 미학적 오브제’라는 주제로 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흔적의 미학’(미술문화, 2005), ‘사진의 경쟁-사진의 발명과 19세기 사진의 개척자들’(눈빛, 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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