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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藝일치의 경지 보여줘…번역과 탈초의 오류 아쉬워
學藝일치의 경지 보여줘…번역과 탈초의 오류 아쉬워
  • 박철상 고문헌연구가
  • 승인 2006.10.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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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추사 1백50주기 전시 제대로 됐나

전시명/일정/장소 
  ‘추사 김정희: 학예일치의 경지 전’(10.3~11.9, 국립중앙박물관)
 ‘추사 150주기 기념 특별전’(10.15~29, 간송미술관)
 ‘추사 150주기 특별전’(12.27~2007.2.25,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조선말기 회화전’(10.19~2007.1.28, 삼성미술관 리움)

□ ‘잔서완석루’, 137.8×32.8cm, 국립중앙박물관.
올 가을엔 가을 ‘秋’자가 사람들의 입에 유난히 오르내리고 있다. 秋史 김정희(1786~1856) 선생의 1백50주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가을 秋’자가 ‘추사 秋’자로 바뀌기라도 한 듯하다. 박물관, 미술관의 가을바람은 더욱 거세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 국내 굴지의 사립미술관에서 추사를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도 특별전을 준비한다. 이렇게 한 사람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전시가 동시에 열린다는 사건 자체가 경이롭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과연 이들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추사를 北學의 宗匠이자 19세기 학예의 관문이란 말로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 그리고 학문은 조선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고, 19세기는 바로 추사에 의해 해석되고 수용된 북학의 시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와 지식, 그리고 사유의 틀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북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북학이 추구하는 학문과 예술의 궁극은 ‘博雅’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박아는 학문과 예술의 혼융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학예일치의 경지’를 테마로 내세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가 주목을 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세한도’나 ‘불이선란도’ 같은 명품들이 전시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새로움 때문이다. 그것은 자료의 새로움, 해석의 새로움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들 상당수는 여태 한 번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다. 이렇게 많은 자료들이 처음 소개된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작품들의 수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존에 잘못 해석된 작품들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새로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록으로 이어진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물론 탈초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고 印章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설명문의 기본이 되는 논문을 함께 표기해 표절시비를 애초에 없앤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전시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도록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추사의 학예일치의 경지를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학예일치의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욕심을 부려보자면 추사의 글씨와 함께 최고의 경지로 평가받는 對聯이 적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리 아쉬울 것도 없을 듯하다. 대련이라면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있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寶庫다. 특히 추사 연구에 있어선 産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수차례 추사와 그 학파의 서화에 관한 전시가 있었고, 여러 성과물이 발표돼 학계에 큰 공헌을 해왔다. 따라서 이번 간송미술관 전시는 그동안 소개됐던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선별된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보기에 따라선 기존 전시 작품들을 그대로 다시 전시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건 없다. 명품은 언제 봐도 명품이기 때문이다.

□ ‘호고연경’, 129.7×29.5cm, 간송미술관.
추사전이 열리는 간송미술관에 갈 때면 필자가 제일 먼저 찾는 작품이 있다. 바로 ‘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라는 대련이다. ‘옛 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공부하느라 여러 날 동안 시 읊는 것조차 그만 두었다’란 의미다. 여기엔 젊은 시절 추사가 학문에 매진하는 모습이 너무도 생생히 담겨 있다.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는 말에선 금석학에 심취했던 추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고, ‘경전을 공부하느라…’는 말에선 詩學과 經學에 매진하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옛 것을 좋아한다(好古)’는 말에선 그 학문의 뿌리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추사는 대련을 통해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정확히 표현했다. 대련은 청대 문화를 상징한다. 추사는 바로 이 대련에 뛰어난 작가였고, 그의 학문과 예술이 혼융된 대련에 청조 문사들은 환호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간송미술관 1층 사방을 채우고 있는 대련들은 바로 이번 전시의 주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추사체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추사와 그의 학파의 서화가 모두 모여 있는 전시라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러 번의 전시와 도록의 발간에도 불구하고 번역과 탈초의 오류들이 여전히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령, 명품 중 하나인 ‘대팽고회’ 대련의 경우 협서 句讀에도 문제가 있지만, 古農에게 써준 작품을 杏農에게 써 준 것으로 판독하고 행농에 대해 설명한다.

또 전기의 ‘석림강정’은 탈초는 물론 번역까지 오류다. 끝부분을 ‘俗子聞之, 無不均慮也.’로 탈초하고, ‘속인이 들으면 모두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로 풀고 있지만, 이것은 ‘俗子聞之, 無不胡盧也.’의 오류이며, 해석 역시 ‘속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모방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로 해야 한다. ‘胡盧’는 ‘葫蘆’를 음차한 것이며 모방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에도 ‘下’로 읽고 ‘옥소리 나는 발 아래에서’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瑋公’을 잘못 읽은 것이다. ‘瑋公’은 전기의 字이므로 번역할 문구가 아니다. 전시가 끝나면 도록만 남는다. 그리고 그 도록은 학계의 양식으로 비축된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리움의 전시는 앞의 둘과는 다르다. ‘조선말기 회화展’이란 주제답게 회화를 중심으로 했다. 추사보다는 제자들이 중심이다. 그래선지 추사의 작품은 조그만 방에 몇 점 전시됐을 뿐이다. 전시 주제와는 그다지 관련 없어 보이긴 하나 쉽게 볼 수 없는 작품들이란 점에서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듯하다. 회화는 ‘‘畵員’과 ‘전통’, 그리고 ‘새로운 발견’’이라는 주제로 전시됐는데, 추사 제자들의 뛰어난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다만 추사학파의 서화만 가지고 볼 때 북학에 대한 명확한 이해 속에서 다루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죽로지실', 133.7*30cm, 삼성미술관 리움.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의 특성상 서화에 중점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 추사의 학문세계를 함께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만족할만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렇다면 추사의 학문 세계는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학계의 몫이다. 그러나 적어도 추사의 학예에 관한 학계의 연구 성과를 조망해보면 만족스럽다고 할 순 없다.

여러 차례 문집이 간행되긴 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문집조차 마련되지 못했다. 작품 분석도 마찬가지다. 그 유명한 ‘不二禪蘭圖’에 등장하는 글자도 이번 전시에서야 바로 잡혔고, ‘난맹첩’에 등장하는 짧은 글귀 하나 제대로 해석 못해 추사가 ‘난맹첩’을 그리면서 여백에 여자이야기를 가득 써 놓은 걸 가지고 기생에게 그려줬다느니 이해할 수 없다느니 하는 엉터리 해석을 해왔다. 추사가 요구했던 金剛眼 酷吏手의 안목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문의 文理도 나지 않고 書法에도 문외한인 사람이 19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지성을 평가하고, 추사에 관한 논문 한 편 쓰지 않은 인사동의 장사꾼이 학자를 자처하며 추사 연구의 대가인 양 떠들고 다니는 것도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학계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이런 일들이 발생했겠는가. 추사 김정희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학문적 연구 성과 없이 어떻게 진위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학예일치의 경지를 입으로만 외칠 것인가.

추사의 인장 중에 ‘士大夫當有秋氣’라는 게 있다. 선비에겐 추상같은 기상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선비의 글씨에도 선비의 그림에도, 그리고 선비의 글에도 추상같은 기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비는 시대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추사가 이 시대 지식인들에게 외치는 棒喝 같은 것이다. 정직하라, 그리고 철저해라. 이제 공은 학계로 넘어갔다. 이 가을의 전시회만큼이나 풍성한 성과를 내야하는 것도 학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秋史의 추상같은 기상이 그립다.

박철상 / 고문헌연구가

고문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장서가와 장서인을 정리하고 있다. 추사를 중심으로 한 북학파 및 중인들에 대한 연구와 19세기 각분야 전문가들의 행적을 발굴하고 있다.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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