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23:30 (화)
[반론]정재현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제415호)에 답한다
[반론]정재현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제415호)에 답한다
  • 손영식 울산대
  • 승인 2006.10.21 0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엇이 標準이고 代案인가 … 구체적 비평을

손영식 / 울산대·중국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송대 성리학에서 철학적 쟁점의 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조선의 역사와 철학의 모험’ 등의 저서가 있다.

작년에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조선조 유학의 계통에 관한 새로운 대안이 한국인 학자에 의해 제시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조선조 유학의 지형도가 조만간에 미국의 학계나 중국어권의 연구자들에 의해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이 글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 동양철학계의 수준이 이 정도로 평가를 받는가.

필자가 혜시·공손룡 墨經의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20년이 돼간다. 명가 명제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이 대부분 비논리적이어서 헷갈렸기 때문이다.

名家에서 ‘원전’을 찾는 것이 왜 오류인가

논쟁서평이란 이름에 걸맞게 정재현 교수는 비판 일색으로 썼다. 하지만 혜시·공손룡 변자들의 명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낸 것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특히 혜시의 명제들을 논리적으로 푼 것은 처음이라 자부하고 싶다.

나는 名家 명제 해석에 있어서, ‘지적인 금욕주의’를 원칙으로 세웠다. 명가의 명제는 모순되거나 상식과 반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그 명제를 ‘절대성-상대성’ 같은 도깨비 방망이로 너무 쉽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 오직 상식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 일차적으로 명가 당시 제자백가의 문헌들 안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기존에 명가의 명제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해석의 원칙’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기존 이론을 ‘표준적 해석’이라 하고, 필자의 이론을 ‘대안적 해석’이라 한다. 그는 기존 이론의 편에 서 있다.

혜시와 공손룡의 명제는 남아 있지만, 그에 대한 논증과 학설이 없다. 따라서 그 명제들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혜시와 공손룡의 원래 논증과 같은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혜시나 공손룡의 실제 작업’과 ‘그에 대한 해석 작업’을 구분해서 표시해야 한다는 정 교수의 주장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어차피 어느 누구의 해석인들 혜시와 공손룡의 논증과 같다는 직접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각자 최선을 다해서 해석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해석들이 경쟁을 하면 된다.

정 교수는 ‘혜시와 공손룡의 실제 작업’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풍우란 등이 지금까지 해왔던 해석을 ‘표준’이라 하는 것 같다. 그것이 혜시와 공손룡의 실제 작업과 더 같을 것이고, 필자의 해석은 ‘대안’이라는 것이다.

필자의 해석이나 그들의 해석이나 다 ‘대안’이지, 그들만 ‘표준’인 것은 아니다. 필자는 기존의 표준적 해석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의 해석에 비논리적인 것이 많았기 때문에, 더 논리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명제 전체 해석의 새로운 틀을 제시했을 뿐이다.

정 교수는 필자의 ‘대안’적 해석이 기존의 ‘표준’적 해석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넘어서지 못 했다고 하는데, 물론 짧은 서평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어떤 점에서 넘어서지 못했는지 명확하게 지적해 주시면, 반드시 답을 하겠다.

공손룡이 말과 지시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혹은 속성을 잡아 두는 ‘본체’, 혹은 ‘것’을 부정하고, 오직 속성만 존재한다고 했다는 것 - 이것의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필자는 白馬非馬, 離堅白 등의 해석을 통해 그것을 설명했다. ‘근거’를 찾기 힘들다면, 필자의 명제 해석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혜시의 역물 10사를 ‘사건의 지평’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인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그럴 수 없는 세계의 경계선의 영역’이란 의미인지 불분명하다”고 비판한다. 사건의 지평은 그 둘 다를 합한 것이다. 설사 그렇게 의미가 불분명하다 하더라도, 필자가 역물 10사 명제를 해석한 것에 흠이 가지는 않는다.

혜시가 다차원적인 실재 세계를 주장했는가. 아니면 하나의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인식 방식의 다차원성만 말했는가. 필자는 역물 10사를 기하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해서 혜시가 다차원적인 실재 세계 개념에 도달했음을 증명했다. 혜시가 하나의 세계를 다양하게 인식한 것이라면, 역물 10사를 가지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시기 바란다.

‘비약’과 ‘거친 단정’ 안에 논리가 있다

필자의 해석은 단지 ‘기발한 아이디어’인가. 명가학파는 상식에 도전한 궤변론자라는 평가처럼 늘 경쾌하고 발랄하다. 논리는 근엄하고 장중한 것만은 아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안 되고, ‘근엄한 이론’만 되는 것은 아니다. 비약과 거친 단정, 기발함과 가벼움 속에 단단한 논리가 들어 있다.

혜시와 공손룡은 명제만 남았고, 증명이나 학설은 남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명제들에 대한 최대한 합리적인 해석이다.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이든 가능하다. 단 ‘지적인 금욕주의’의 원칙만 지키면 된다.

정 교수는 “명가 철학 복원의 첫 시도”라고 과분한 평가를 해주었다. 첫 시도라는 것은 이제 혜시와 공손룡에 대한 해석의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다. 필자의 해석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나의 해석이 불쏘시개가 되리라 기대한다. 내 해석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과 부정에 대해서는 성실히 답을 하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