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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 對中 인식론 문제 … ‘고국원왕 항복설’도 의문
이중적 對中 인식론 문제 … ‘고국원왕 항복설’도 의문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6.10.01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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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이희진 박사 여호규 교수 학설 비판 / 이은혜 기자
아시아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고구려 장수왕의 묘지 '장군총'

중국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반작용으로 최근 국내 역사학계의 고구려사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고구려사에 대한 실증적 접근과 함께 기존 연구태도에 대한 비판도 나오기 시작한다. 몇몇 주목할 만한 논문도 발표됐는데, 아직 문제제기만 있고 토론은 없는 상황. 

그런 가운데 최근 ‘역사학보’(190집)에서 이희진 서강대 강사(한국고대사)가 ‘고구려의 대중인식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국내 연구자들의 고구려사 인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관심을 끈다. 논문은 특히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의 연구를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이유는 그의 연구물들이 국내 고대사학계에 큰 영향을 끼칠뿐더러, 한·중간의 관계를 ‘이중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기존의 일방적 민족주의를 극복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박사에 따르면, 여 교수는 논문을 통해 ‘고구려는 중국에 대해 이중적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관점을 피력해왔고 그 대표적 근거로 광개토왕비의 후연관계 기록을 들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왕조와 다양한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요동진출이란 훈적을 기록하려 하자 난처하게 된 것.
이런 상황에서 찾아낸 묘안이 광개토왕비 후연관계 기사의 기술방식인데, 즉 “광개토왕이 정토를 개시하기 전부터 요동지역이 고구려 영토였던 것처럼 상정하고 이를 광개토왕이 순행한 것으로 묘사해 후연과의 조공-책봉관계나 요동지역을 둘러싼 각축전을 드러내지 않고 대왕의 위대한 훈적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 교수는‘고구려는 대내적으로는 중국 왕조와 조공-책봉관계인 것을 드러내지 않고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설정한 범주 내에서 독자적인 천하질서를 구축했다’고 해석하는데, 여기에 이중적 대중인식이 응축돼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먼저 용어부터 문제 삼는다. ‘이중적 인식’이라 하면, 인식 자체가 이중적이었다는 의미가 돼 ‘고구려의 의식 속에 전혀 다른 의식이 혼재했다’는 식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으므로 “부적합한 용어사용”이라는 지적이다.

논문은 본격적으로 ‘4세기 전반 다원적·중층적 신국제질서에 무지해서 대결과 투항을 반복했던 고구려가 4세기 중·후반 이후 그에 편입되어갔다’는 여 교수의 주장을 따져본다. 이 박사는 먼저 “‘다원적·중층적 신국제질서’로 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힘이 약할 때 굴복하는 척 했다가 강해지면 중심세력에 도전하는 게 동양사에서는 일반적 현상인데 굳이 ‘신국제질서’로 명명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과연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대결과 투항을 반복할 정도로 국제질서에 무지했을까”라고 반문한다.

여 교수는 이 시기 몇몇 사료를 들어 고구려가 ‘투항’했다고 하는데, 이 박사는 “사료에 따르면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타협 정도만 한 것이지 투항이나 內屬도 아니었고, 또 국제질서에 무지했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고구려는 ‘무지’했던 게 아니라 전연이 침공을 해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이 박사는 여 교수가 355년 이후 고구려와 전연이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것에 대해 “근거가 희박하다”며 반박한다. 여 교수가 들고 있는 세 가지 근거를 따지면서 그는 “고구려와 전연 간에 특별한 무력충돌이 없었을 뿐 특별관계로 보기 어렵다”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나아가 “고구려는 그 와중에도 제3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등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병행했다”며 진에 조공을 보낸 것 등을 예로 들어 “고구려는 국제질서에 결코 무지했거나 전연에 내속했던 게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이와 같은 사안을 어떻게 규명하는가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전연의 뒤를 이은 전진과 고구려 관계까지 규명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여 교수는 전진과의 관계를 ‘변형된 조공-책봉관계’라고 규정짓고 있다. ‘전진이 위협되지 않는 주변국에 대해선 위무책을 독특한 대외정책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박사는 “개념의 실체가 의심스럽다”라며 “과연 조공-책봉관계도 수립하지 않은 전진과 고구려가 상하 외교관계를 맺었을까”라고 반문한다.

나아가 여 교수는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킨 수제국 시기에 고구려와 수가 조공-책봉관계에 대한 인식이 서로 달랐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조공-책봉관계는 유교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라 제멋대로 인식하기 어렵다”며 “고구려가 수와 상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라고 비판한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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