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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결코 암울한 시대일 수 없다"
"70년대는 결코 암울한 시대일 수 없다"
  • 박정자 상명대
  • 승인 2006.09.20 15:24
  • 댓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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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불온’과 ‘발칙’의 신화학
박정자 / 상명대, 불문학

‘싸가지 없다’에서 ‘짝퉁’, ‘왕따’, ‘된장녀’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의 신조어는 어쩐지 어감이 천박하여 점잖은 어른들은 좀체 따라 하기가 쉽지 않다. 왜 좀 더 젊은이다운, 재치 있고 상큼한 신조어를 만들어내지 못할까? 그러나 현재적인 현상을 설명할 때 현재 통용되는 어휘를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내키지는 않지만 가끔 나도 그런 단어들을 입에 올리고는 있다.

세대나 집단을 가르는 것은 옷차림만이 아니다. 특정의 단어는 말하는 사람의 연령과 세계관을 드러내 보여준다. ‘주택 담보 대출’에서처럼 담보를 ‘빚진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대신 맡기는 증권이나 물건’이라는 법률 용어로만 알고 있던 우리 세대는 ‘어떤 의미를 지닌다’라는 의미로, 그것도 동사로 ‘담보한다’라는 말을 쓰는 운동권의 글을 보고 매우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것이 북한의 용어였는지 모르겠다.

386세대의 기자나 문화 관계 필자들의 글에서는 ‘불온’과 ‘발칙’이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단어이다. 영화 평이나 미술 평 같은데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을 ‘치안을 문란케 할 우려가 있음’이라든가 ‘몹씨 버릇이 없음’이라는 부정적 의미 그대로 이해해서는 큰 일 난다. 그 의미는 그대로이지만 그것은 나이든 기성세대가 과거에 그들에게 말했던 ‘소위 불온’ 과 ‘소위 발칙’이라는 의미이다.

과거의 기성세대가 우리들을 ‘불온’하고 ‘발칙’하다고 했으나 정의는 우리의 것이고, 도덕적 우위도 우리 편에 있다는 것을 그 단어들은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까 두 단어는 정말 불온하고 발칙한 네거티브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결속을 다지며 과거의 어른들을 他者로 내어 모는, 매우 포지티브하고 배타적인 의미이다.

‘불온’과 ‘발칙’을 즐겨 말하는 사람이 여성 필자라면, 아이 둘은 낳아야 인구가 유지된다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우리가 언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느냐’며 호통을 치기 십상이다. 파시즘의 언어로 파시즘을 질타한다는 지적 유희를 과시하면서.

그들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70년대를 서양의 중세처럼 암흑기로 묘사하는 온갖 주제의 영화를 만드는데 열중할 것이다. ‘그 때 그 사람’을 정면으로 공격하기도 하고, 독재자의 이발사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산아제한 정책을 ‘생체 권력’이라는 제법 유식한 도식으로 재해석하여 희화화하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반미 성향의 영화를 만드는데 골몰할 것이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는 않은 채, 그저 눈(雪)처럼 터지는 팝콘 밑에, 찝찔한 오징어 다리 밑에, 아니면 여중생의 교복 밑에 반미를 은근히 깔아 놓고 겉으로는 재미만, 혹은 가족애만 추구할 것이다. 혹시 올드보이 중에서 그 밑에 깔린 불온한 사상을 눈치 채어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그들은, 유머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기성세대는 역시 경직되어서 어쩔 수 없다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 영화로 즐겨 달라고, 그렇게 세련되게 말할 것이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는 ‘암울한 70년대’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확산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현대의 신화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신화란 주로 우파의 신화일 뿐, 좌파의 신화는 數的으로도 적고, 서투르기 짝이 없어 별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암울한 70년대’처럼 오늘날 우리나라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신화들은 모두 좌파의 것이고, 서투르기는커녕 너무나 정교하다.

롤랑 바르트를 그대로 따라서 말해 보자면 신화는 역사를 죽인다. 70년대에 부분적인 인권의 제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은 역동적이고 행복한 것이었다. 지금의 386세대를 그처럼 화려하게 키워 준 富가 축적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들이 捨象된 채 오로지 한 부분만 부각되어 ‘암울한’이라는 부가형용사와 ‘70년대’라는 시기가 한 데 짝을 이루고 있다.

신화의 한 특징은 또한 격언과 같은 반복성이다. 반복성은 모든 합리성을 죽이는 효과가 있다. 지겹게 반복되는 광고 문안의 효과 같은 것, 거기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 없다. ‘암울한 70년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70년대는 이론의 여지없이 암울한 것으로 각인될 것이다. 바르트의 말대로 신화는 특정 세력의 기호학 체계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사실 체계로 읽기 때문이다.

TV 화면에서 옛 가수가 70년대의 정감어린 가요를 노래 부르고 있다. 저런 노래를 만든 시대, 그것은 결코 암울한 시대일 수가 없다. 빼앗긴 언어를 되찾아 오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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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2006-09-29 17:17:54
박정자 샘 얘기가 그저, 봉인돼버린 경험/욕망이 이젠 드러나야 한다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요? 외려 그것들이 어떻게 기억되고, 또 드러나야 하는지 충분히 드러내보인 거 같은데.

박 샘 얘긴 꽤 오래 전부터 일본서도 바람이 분 바 있는, "알흠다웠던 1960/70년대" 담론의 부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슴다. 이 담론들은 여러 상품 형태로 변주되는 가운데 상당한 규모의 소비시장을 형성했다죠. '승승장구하는 일본'상 구축에 걸맞도록 예쁘게 윤색된 '추억상품'들로 말이죠. 이런 소비 경향이 일본의 우경화 경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같은 경향의 무리없는 진행에도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했음은 물론입니다.

박 샘 글의 심각한 문젠 고작해야 이런 류의 기억만들기를 지지하고 말 공산이 크다는 겁니다. 정작 망각의 봉인으로부터 풀려야 할 집합적 기억/경험들이 뭔진 마치 모르는 척 딴청피면서 말임다. 어쩌면 알지만, 그런 얘긴 이제 어찌돼도 내 알 바 아니란 얘길 하려는 건지도 모르고요. 글의 전반적 정조를 보면, 부르주아적 감수성도 존중돼야 할 권리라 하시는 듯한데요. 뭐, 부르주사회체제에서 부르주아적 감성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거야, 사실 극히 지당한 얘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지라, 박 샘 글이 정말이지 놀라운 건 그런 권리주장 따위 때문인 건 절대 아님다. 정작 놀라운 건 그같은 권리의 향유가 어떤 사회적 배제/차별 속에서 주어지고 있었던가에 대한 '시각'의 부재, 또는 노골적 무시지요. 여기서 박 샘이 어떤 관점, 혹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진 이미 드러날대로 드러나버린 거 아닌가요?

박 샘은 지금껏 잘.못.쓰.여.온. 거대담론으로 인해 봉인된 기억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밝히고 만 게 절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박 샘은 "누적적 발전과 번영"을 골자로 "너저분하고 쪽팔린" 기억의 소거를 염두에 둔 "대한민국사 만들기"에 '한 표'를 던지고 있다는 거죠.

논리적 비약일까요? 그건 아니겠지 하고 봐주려 해도, 좀체 그리 보이진 않는데요.

그래서 2006-09-29 10:05:01
위 글에서 지적해야 할 주요한 부분은 소위 "(과거건 현재이건) 현재의 담론 속에 표현이 안되거나(배제/억압되었던) 못되었던 경험/욕망(?)" 등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히 중립적인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고.. 위의 박 선생이 그것을 어떠한 관점에서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키지 않고 단순히 드러내야한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인거죠..

켜허 2006-09-27 12:07:20
그새 또 댓글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얘길 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敎學相張만큼 지금 절실한 말이 또 있을까 싶곤 해요. 기존 지식이 그런대로 먹히긴 하나 그것만으론 가늠키 힘든 세계사적이고 전지구적인 변환이 진행중인 지금, 중요한 건 얘길 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겸허해지는 게 아닐까 해서요. 그렇다고 어설픈 상호존중을 하잔 얘긴 절대 아니지만요.^^ 지식인이 '대중'이 돼야 한단 건 이런 의미랍니다.

켜허 2006-09-27 11:58:56
좌우당간, 님과 이래 얘기를 하게 돼 즐거웠네요. 이것도 다, 박정자 샘 덕분 아닌가 싶슴다. 물론 본의 아니게 그리 된 거라 해야겠지만요.^^ 모르긴 몰라도 무지몽매인님께선 진리는 쉽다,란 쪽에 서 계신 듯한데, 글쎄요, 그게 정말 그런가 싶은 쪽이라;; 진리 자첸 쉬울지 모르나 그걸 아, 하고 깨닫는 과정은 나름 즐겁지만 참으로 복잡하고 괴로운 것이기도 하단 생각이 드는지라서요.. 모쪼록 건승하시길.

무지몽매인 2006-09-27 11:57:02
글들의 순서가 얼키네요. 그것도 그런대로이겠지만...
쉬운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 지식이 아니요, 누구나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그것이 학계의 자긍심은 아니고, 그럴수 밖에는 없다는 말로 쉬이 해명되어서도 안되겠지요. 다만, 제 하기 나름이겠지만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 그런 우월감의 발로라고 봅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으면 웃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