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5:25 (목)
쓰고 싶은 것과 들려주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과 들려주고 싶은 것
  • 이하림
  • 승인 2023.06.05 08: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이하림 연세대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한동안 원고를 쓰기가 어려웠다. 매 글의 시작이 어렵지만 이 글이 유독 어려웠던 이유는 요청받은 ‘한국에서 박사하기’라는 주제의 지대 위에 치열하게 서 있는 것을 버겁게 느꼈던 긴 시간을 겨우 빠져나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학사·석사·박사과정을 보내는 동안 나에게도 유학에 대한 갈증과 고민이 있었지만 결국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선택했다. 한국에서 인문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까지 공부한다는 사실은 미국에서 인문학 박사과정을 지속하겠다는 선택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선택을 변호하고 그 결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더 이상 지치고 싶지 않았다. 지쳐서 아무 것도 못할 바에야 의식적으로 태평하고 게으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 말은 나조차도 스스로의 이유에 설득되지 않았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집안 형편을 무릅쓰고”로 시작되는 문장을 채워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만큼 불굴의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 문장을 쓰지 않아도 되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박사 진학을 앞두고 고민하는 내게 일종의 죄책감으로 남아있었다. 학부와 석사 과정에서 나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동료들이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은 취업하겠다고 말할 때 나는 그들의 마음까지도 짊어진 큰마음이 아닌 이상 한국에서 박사 생활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국내 인문학 박사가 재정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울뿐더러 학비까지 부담해야 하기에, 그래서 어엿한 직업으로 인정하고 인정받기 어렵기에 생기는 두 가지 마음이었다. 돈을 벌 수 없기에 누군가는 떠나고 돈을 내기에 누군가는 부채감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좋아서 하는 일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마음들이 특히 ‘한국에서’ 박사 하기의 지대를 더 자주 맴도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어느 쪽이든 이 지대 앞에서는 구조적인 이유로 인해 지극히 혼자서 자신 일부를 소모하게 된다. 

여러 정황 상 나는 미국에 가지 않았고, 그럼에도 쓰고 싶었고 글로 세계를 이해해 보고 싶었다. 국내 인문학 박사에 대한 여러 텍스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자긍 섞인 자조 혹은 자조 섞인 자긍의 태도는 내게도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었다. 조교와 외부 청탁 등 다른 일을 부지런히 하면 어느 정도의 돈은 벌 수 있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에는 부족한 금액이었다. 무엇보다 그 돈은 연구로 번 돈이 아니었다. 읽고 쓰는 일은 즐거웠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에서의 시간을 자신 있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돈은 못 벌지만 / 쓰고 싶어서 쓴다(공부하고 싶어서 공부한다)”라는 문장을 두고 상황과 상태에 따라 앞부분을 더 크게 절감하다가 뒷부분을 더 크게 의식하기를 반복하며 자조와 자긍 사이를 오갔다. 

그렇지만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마음을 공유하는 뛰어난 연구자들이었다는 점은 다행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의 의미는 내게 생긴 많은 스승과 동료들이 채워주었다. 그러던 중, 언젠가 만난 한 편집자는 ‘쓰고 싶은 것보다도 들려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어왔다. 단행본 일반에 관한 말이었지만 연구자로서도 내게 필요한 질문이었다. 박사과정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이 무엇인가 쓰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쩌면 쓰는 곳이 다름 아닌 한국인 이유는 들려주고 싶은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문화 안에서 내가 보고 느낀 아름다움을 쓰고 싶다고 할 때, 이는 자아와 전문성에 관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쓰는 행위 앞에는 ‘나’ 한 명이 주어로 위치한다. 하지만 들려주는 행위는 (들려‘주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자아를 경계한다는 중요한 전제하에) 복수의 가능한 청자들로 완성된다. 청자는 연구대상이 될 수도, 지금의 동료와 스승이 될 수도, 과거의 동료들이 될 수도, 그리고 나와 연구 대상, 떠난 이와 남은 이를 만든 구조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들려주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청자의 신체와 환경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쓰는 나를 상상하면 내가 해외 여기저기에 있는 모습을 쉽게 그려볼 수 있지만, 누군가 나의 연구를 듣는 장면을 꿈꾸면 나는 아직까지, 그리고 여전히 한국을 그 배경으로 떠올린다. 윤원화 선생님의 문장처럼 “세계를 일련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이론의 일”이라면, 국내에서 연구하는 일은 가까운 세계를 가까운 언어로 번역해 보는 일과 닿아 있을 것이다. 같은 세계에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른 언어들, 그래서 번역이 필요한 순간들을 몸과 일상으로 부딪히고, 그럼에도 마주하게 되는 번역의 곤궁함 위에서 시작해 보고 싶다. 내게 같은 언어를 쓰는 청자가 있는 곳에서 연구하겠다는 말은 그럼에도 왜 어떤 말은 가닿기 어렵고 그래서 어떻게 미묘하게 서로가 서로의 타자가 되고 마는지, 그럼에도의 지점을 파고드는 일과 관련된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인문학이기에 유의미한 일이다.

자기가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국가라는 관계를 들려주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로 생각해 보고 싶다. 한국에서 박사를 하는 개인적인 이유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대신하는 제안이기도 하다. 또한, 국내 연구자들이 떠나지 못해 남겨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 사례를 하나 더 덧붙여보고 싶었다. 이곳에 그 미묘한 이야기들을 더 섬세하게 들려주고 싶어 남는 사람들도 있다. 잘 할 것이다. 인문학의 미래를 논할 때 어떤 층위에서는 근면하고 영민한 인문학을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로 주장하면서 연구 결과물의 전달 범위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층위에서는 연구자와 연구 대상, 지식과 지식이 놓인 구조가 맺게 되는 관계에 대해 연구자가 지녀야 할 성찰성을 이야기한다. 들려주고 싶은 것, 듣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연구자와 학계 구조 모두가 이 두 층위의 논의와 결과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고민이다. 

이하림 연세대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기억과 시각문화가 교차하는 곳에서 생기는 집과 경계, 타자의 문제를 연구한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경험한 적 없는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잔재의 이미지」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연세대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최근에는 동료들과 지대를 공유하고 영토를 범람하는 글쓰기 작업에 관심이 많다. 머뭇대며 다가가는 것, 뒤돌아보며 걸어가는 것이 글과 생활의 방법이라고 생각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