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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민족, 신화와 현실
[기획특집] 민족, 신화와 현실
  • 신형기 / 연세대
  • 승인 2001.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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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상상하는 서사, 영웅서사가 만든 남북의 역사
남북이산가족의 감격적인 상봉,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한 동시입장, 경의선 철도의 복원, 이 모두가 최근 숨가쁘게 진행돼온 남북관계, 혹은 민족열기의 목록들이다. 최근의 과잉 민족열풍은 그동안의 냉전과 분단의 세월을 돌아보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며 마땅히 ‘고무찬양’돼야 옳다. 그러나, 혹시 남북화해무드가 낳은 ‘민족주의 열풍’이 모든 이질성과 타자성을 그 안에 수렴·용해시키는 초월적 중심으로 기능한다면? 최근 체계적인 북한문학사를 저술한바 있는 신형기 교수(연세대 국문학)는 남북한의 현 대사를 추동시켜온 동력은 ‘민족이야기’라고 규정한다.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은 근대의 지배적인 서사로 떠오른 민족이야기가 만들어낸 산물이고, 남한의 박정희나 이승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역사를 구성해내는 이야기의 힘. 이 글은 이야기의 문법을 탐구하는 서사론의 시각에서 남북한 50년을 읽어낸다.

●민족 서사로 본 남북한 50년

 

민족을 상상하는 서사, 영웅서사가 만든 남북의 역사

신형기 / 연세대·국문학

한동안 ‘근대’는 막연히 좋은 것으로 간주됐지만, 봉건적 질곡을 깨뜨렸던 ‘근대’의 해방적 역할을 확인하기보다 이 시대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억압의 기구들이 마련됐던가를 보려는 것이 오늘의 추세인 듯하다. 분석의 대상일 수 없었던 ‘민족’의 거룩한 유구함이 근대에 들어 특별히 부각된 신화라고 해서 놀랄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겠지만, 근대화를 통해 본격화됐고 민족의 자기인식을 위한 것으로 시작된 이른바 국학 연구에서도 자신의 입지와 출발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일기에 이르렀다는 점은 우리가 한 시대를 정리해야 하는 전환점에 서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민족을 상상적인 이야기(서사)로 보는 입장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보려 한다. 민족이야기란 근대가 민족을 상상케 한 방식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민족이야기, 근대의 민족에 대한 상상

이야기는 처음과 중간, 끝이 있는 서사다. 텍스트의 결합은 따로 잘라낼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이룸으로써 이야기를 달성한다. 하나의 전체란 이야기가 그 대상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민족의 시원과 면면한 내력을 돌이키고 ‘위대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민족이야기의 일반적인 틀이었다. 민족의 처음 중간 끝을 제시하는 일은 민족사 서술의 대상이다. 민족이야기가 민족사 서술의 형태를 취하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근대에 들어 우리의 경우에서도 민족사 쓰기는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러나 목적론적 서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족사 쓰기는 또한 민족이야기를 구체화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처음과 중간, 끝으로 이루어지는 전체로서의 이야기는 구성요소들의 일관된 결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상상된 것일 수밖에 없다. 전체란 상상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이 상상된 이야기는 과거를 일깨웠을 뿐 아니라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성스러운 출발점과 투쟁의 역사를 되살려내고 ‘훼손’의 과정에 분노하거나 오늘의 수난이 해방과 번영의 약속임을 말하기 위한 민족사 쓰기에서 서술대상의 선별은 불가피한 탓이다. 하나의 단일한 전체란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던가.
민족이야기는 단지 민족을 상상하게 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서술은 경험과 기억을 조직하며 상상의 방향 및 범위를 제한하고 이로써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세계를 규정하는 이야기의 통사론적이고 의미론적인 법칙들은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법칙일 수 있다. 이야기야말로 존재의 집인 것이다.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가 지배적인 상황이란 하나의 세계 속에 갇힌 상황이며 하나의 법칙만이 통용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근대에 들어 민족이야기의 문법은 파시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통합 수단이 됐다.
민족이야기가 근대에 들어 지배적인 것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상상의 공동체가 귀속의 안정감을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민족적 열정은 계급적 착취와 불평등에 의한 상처를 덮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집단적 연대를 꿈꾸게 했다는 것이다. 근대를 국민국가가 성립되고 국가들이 경합해온 과정으로 볼 때 민족이야기가 의도한 민족적 정체성의 확보란 전면적 국민 동원을 위한 一者化라는 국가의 요구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입장은 조금 달랐지만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제국열강의 침입에 맞서는 대항민족주의의 입장을 공유하게 한 동력은 무엇보다 국가의 상실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을지문덕이나 이순신과 같이 영토를 지키고 국가에 영광을 돌린 ‘위대한 과거’의 영웅들은 모두가 떨쳐 일어나 구국에 나설 것을 명령하는 민족이야기의 본보기 형상으로 제시됐다. 민족은 귀속의 안정감을 제공했던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 부름에 응할 것을 절실하게 명령했던 것이다.

민족이야기가 만든 김일성의 신화

국가 상실이라는 절멸의 공포를 바탕으로 하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앞세운 점은 우리 민족이야기에서 두드러졌던 면모다. 그런데 이런 면모는 민족이야기의 폭력성을 증폭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 나라를 되찾는 것이 절대적 목표였던 만큼 민족 안의 타자는 철저히 배제돼야 했다. 도덕적 정당성은 일자화를 또한 정당화했다. 필자는 북한문학사를 정리하면서 김일성이 민족해방의 영웅으로 등장해 유일무이한 영도자가 되는 과정은 민족이야기의 역할을 통해 설명돼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 김일성이 민족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민족이야기가 김일성을 만들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절멸의 공포 속에서 출현한 이 영웅은 이내 히스테리칼한 경배의 대상이 됐다. 일제와 맞서 싸운 그는 최고의 도덕성을 구현한 것이다. 그는 도덕적 감응 관계의 정점에 섬으로써 오직 받들고 따라야 하는 존재가 됐다. 현재까지 20권이 넘게 씌어진 그의 투쟁역사를 그린 장편소설 총서 ‘불멸의 력사’는 북한이 써온 민족이야기의 결정판이다.
민족이야기가 하나의 주인공을 갖게 되는 것과 그것이 전일한 지배를 획득하는 것은 서로 무관치 않은 듯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배면에서 공포의 힘은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도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공포의 심연을 바탕으로 國父의 권좌를 더욱 높였다. 반공은 민족을 지키는 길이었고 그는 이 위업을 달성할 지도자였다. 민족을 누대의 가난으로부터 구원하겠다는 기치를 앞세우고 등장한 박정희라는 개발영웅 역시 무자비한 유린과 낙오의 공포를 통해 절대자가 됐다. 건설을 외치는 새마을 운동의 노래가 전국에 울려 퍼졌지만 하나의 이야기라는 폭력에 압도된 결과는 정신적 파탄과 황폐화였다. 주체시대 이래 김일성은 인민의 腦髓가 됨으로써 모든 개별적 사유의 가능성을 박탈했다. 인민은 스스로 생각하고 궁리할 필요가 없는 무뇌집단이 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단군 이래의 中始祖로 간주해 ‘김일성 민족’의 자부심을 갖자는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무뇌집단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單聲主義’의 극복, 문화적 과제로

민족이야기가 지배적인 것이 되는 과정은 그것의 대중적 소비 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 물론 ‘계몽’의 입장에서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차단해온 국가권력의 작용이나 대중적 소비의 조건을 마련한 자본주의의 역할을 생각해야 하겠지만, 하나의 이야기 문법이 시공간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그 경험의 결이 다시 이야기로 옮겨지는 반복의 과정은 문화적 관습을 비롯한 여러 요인들의 중층적 관계 안에서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지배를 정당화한 문화적 텍스트로서의 영웅서사는 여전히 대중소설 등을 통해 거듭 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야기에 의한 지배의 조건이 되는 대중적 소비는 이 지배를 특별한 헤게모니를 갖는 주체나 분명한 출발점이 포착되지 않는, 중심 없는 과정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나 어쨌든 대중적 소비가 지배의 조건이라는 점은 대중의 선택이 여기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는 민족이야기를 필두로 한 單聲主義의 지배와 그에 따른 부정적 영향의 극복이란 상당부분 ‘문화적’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야기 자체를 거부할 수 없는 이상 하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에 의해 견제되거나 성찰돼야 한다. 공공연히, 혹은 은연중에 강요됐던 민족이야기는 이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이야기의 진실이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개연성을 끊임없이 시험함으로써 모색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개연성이 다양하고 진지하게 시험될 때 대중도 보다 신중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hkshin@yonsei.ac.kr

●흐름 :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권혁범 지음)의 탈민족주의 논리

정당성 상실한 민족주의적 발전논리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적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됐던 이데올로기였다. 저항민족주의라는 제3세계적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제국주의’에 대한 정당한 싸움의 무기를 제공했고, 동서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민족적 활로를 모색하는 수원지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패권적 지배에서 벗어나 “반주변부, 반중심부의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마당에 저항민족주의의 방어적 정당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성큼 다가온 ‘통일시대’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로서 남을 것인가?

민족주의, 자본의 경쟁력 논리로 변질

최근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솔 刊)을 펴낸 권혁범 교수(대전대 정치학)는 “한국의 세계체제에서의 위상상승과 함께 민족주의는 적어도 더 이상 방어적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그는 “80년대에 우리의 민족민주운동이 사회전반에 확산시킨 반외세의식은 이제 대기업과 정부에 의해 민중지향성이 제거된 채 한국 자본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고 본다. 그는 민족주의의 세계관을 “민족이 강해지고 잘 사는게 최대의 목표고, 그것이 민족구성원들의 최대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민족은 물론이고 민족내부의 ‘희생’도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으로 규정한다. 민족주의는 불가피하게 ‘적’과 ‘우리’의 이분법적 논리를 요청하게 되며, 이 논리속에서 ‘우리’아닌 타자는 배제되고, 집단이 아닌 개인 또한 억압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민족주의라는 ‘특수성’의 강조는 비합리적 광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그 와중에서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이성’은 사라지게 된다.
권 교수의 논의가 가진 비판적 잠재력은 민족주의에 근거한 발전논리에 대해 내재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독특한 정치학적 구상으로서, ‘개인지향 에콜로지(ecology) 정치’라는 대안적 전망도 기왕의 탈민족주의적 사유에서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열린민족주의’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입론이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발전주의’는 달리 말하면, ‘부국강병주의적 세계관’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세계관은 “한국의 ‘국제경쟁력강화’를 위해 모든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무한경쟁’속에서 ‘민족생존’을 모색한다는 명분하에 휘청거리던 성장이데올로기를 다시 한번 추동시키면서 서구 따라잡기와 무역전쟁의 기관차”를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동력이다. 모든 것이 “민족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맹목적 신념은 여기서 비롯한다. 민족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적 발전주의는 다분히 반생태주의적이다. 왜냐하면, 발전의 논리는 불가피하게 생산력의 끊임없는 확대와 중단없는 성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지향적 사고와 운동은 민족의 신화를 넘어서 인류와 다른 생명체에 대한 보편적 관심의 확대 및 국제적 연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부제 ‘개인 지향 에콜로지정치의 모색’이 내포하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One Korea’의 국가파시즘

개체성과 차이, 생태지향적 사고를 강조하는 권교수의 시각은 통일문제에 대한 시각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통일을 민족동질성의 복원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차이를 단일화하려는 획일주의적 경향”이라는 것.
그는 이러한 ‘One Korea’주의에는 ‘국가파시즘적 세계관’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북한문제를 바라볼 때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할 것을 제안한다. 인권이라는 문제설정은, 보수논객들에 의해 반북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근거가 되고 있지만, “북한사회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역사적 배경속에서 이해하는 관용의 태도를 가지면서도 그것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할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그는 ‘차이속의 공존’, ‘타자와의 공존’과 함께 ‘차이의 극복’을 모색할 수 있는 윤리적 지침이 거기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 책의 탈민족주의적 사유는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 담론’에 대한 생태주의적 비판이라는 새로운 비판의 지평을 열고 있으며, 동시에 남북화해 시대의 ‘정서적 민족주의’가 가진 ‘그늘’을 냉정하게 해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의 민족주의 비판은 탈근대적 사유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결국 ‘개인적 가치와 보편적 이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가치의 옹호’로 귀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논리가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개인과 이성의 질서를 확보하지 못한 ‘미완의 근대’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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