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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깨부수는 빼기의 기술, 소크라테스가 행동으로 보여줬다”
“가짜뉴스 깨부수는 빼기의 기술, 소크라테스가 행동으로 보여줬다”
  • 김재호
  • 승인 2023.06.0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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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스타일』 쓴 김용규 작가 인터뷰
김용규 작가는 독일에서 철학, 신학을 공부했다. 사진=김용규

“진실은 거짓을, 정의는 불의를 제거하면 드러날 것이다.” 바로 지난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송철학상 대상을 수상한 『소크라테스 스타일』의 ‘빼기의 철학’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부터 몬드리안 같은 추상화가들, 애플 신화를 일궈낸 스티브 잡스까지 지난 2천400여 년을 지배해 온 사유와 삶의 혁명은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따랐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인 ‘빼기의 원칙’은 “돌 속에 갇힌 사자를 해방시키려면 사자가 아닌 모든 부분을 없애야 한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에 ‘빼기의 철학’은 더욱 유효하다. 이 책의 저자 김용규 작가(철학박사)는 <교수신문>과 인터뷰에서 “이제 세상에는 거짓과 개소리가 가득하고, 진리와 정의는 아득하다”라며 “만일 소크라테스가 다시 살아온다면, 그는 다시 저잣거리로 나가 편견과 억견과 궤변을 깨부수는 논박을 통해 탈진실의 시대, 개소리의 시대를 종식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은 가짜뉴스를 깨부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사진=픽사베이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통해 2022 우송철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송철학상은 일찍이 철학문화연구소(1987)를 사재를 털어 창건하셔서 계간지 <철학과 현실>(1990)을 발간하시고, 심경문화재단(1994)과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2001)을 통해 철학의 현실화, 현실의 철학화를 위해 애쓰셨던 우송 김태길 선생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입니다. 

김형석, 안병욱 교수와 함께 우리나라 1세대 철학자이자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이기도 하셨던 김태길 선생님은 시민들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윤리적 삶을 살게 함으로써, 사회를 진리와 정의가 바로 선 공동체로 변화시키려고 힘쓰셨던 분이시지요. 선생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라는 준엄한 명령으로 생각하고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빼기’를 실천한 인물들이 디오게네스부터 스티브 잡스까지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책에서는 그들이 갖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극도의 열정과 정직성, 치밀성, 엄격성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과 지속성도 견지했다”(516쪽)라고 적었습니다. 빼기의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어떻게 함양될 수 있을까요? 그 과정은 빼기와 연관되나요?

‘빼기의 철학’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이라는 제 책 제목에 적합한 우리말인 것 같아요. 

말씀하신 대로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빼기의 철학은 지난 2,400년 동안, 한편으로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사유의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삶을 살려는 ‘삶의 방식’으로 인간의 사유와 삶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실천 또는 권장되어 왔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성이라는 특별한 사유형식을 낳아 인류 문명의 한 축을 이루어왔지요.

남아 있는 기록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에게서 석공 일을 배웠고 50살이 다 되도록 석공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석공일을 어떻게 가르쳤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석공들의 작업방식은 똑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를 조각하려면, 첫째는 우선 돌 속에 들어 있는 사자의 형상(形狀, idea, eidos)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돌에서 그 형상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을 모두 쪼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돌 안에 들어 있던 사자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어린 소크라테스는 아버지의 말을 가슴에 새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가면서 점차 스스로 깨달았겠지요. 무형의 돌덩이에서 어떤 형상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 형상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가면서 세상만사가 모두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겁니다.

다시 말해 누구든 진리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진리가 아닌 억견, 궤변, 편견 등을 하나씩 제거해가야 한다는 것,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정의가 아닌 부정과 불의들을 모두 빼내야 한다는 원칙을 깨달았겠지요. 또한 누구든 삶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면, 우리의 일상에 엉겨 붙어있는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예컨대 과시, 사치, 허영, 탐욕 등―을 낱낱이 제거해야 한다는 원칙도 깨달았을 겁니다. 

한마디로 어떤 것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하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제거내야 한다는 사실을 차츰 알아차렸겠지요. 바로 그것이 제가 책에서 ‘소크라테스 스타일’이라 이름 붙인 ‘부정의 원칙’, ‘제거의 원칙’, ‘빼기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처음에는 단지 석공 일을 하는 작업방식(work style)이었지만, 얼마 후부터는 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 되었고, 나중에는 그가 철학을 하는 사유방식(thinking style)이 되었을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을 오직 이 원칙 하나만을 지키며 살았어요. 그가 날마다 저자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자신이 고안한 문답식 대화―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그것을 엘렝코스(elenchos)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우리는 ‘논박(論駁)’ 또는 논박술이라 일컫는다―를 시도했던 것도, 그것을 통해 상대방의 편견과 억측과 궤변들을 깨부수었던 것도, 그래서 그들이 화가 나서 그에게 폭언과 폭행을 저지르게 했던 것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한던 것도, 모두 ‘진리가 아닌 것은 깨부수어 제거해야 한다’는 이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가 욕심이 없음(無慾)과 아는 것이 없음(無知)을 긍지로 삼았던 것도, 생김새나 가난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몰랐던 것(無恥)도, 자기를 우롱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에 개의치 않았던 것(無視)도, 알고 보면 진정한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부정하라는, 제거하라는, 빼내라는 이 철칙 때문이었지요.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빼기’라는 원칙을 통해 석상을 만드는 석공이 아니라 진리와 삶을 조각하는 석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이 빼기의 원칙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한편에서는 사유의 방식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삶의 방식으로 계승이 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책에는 디오게네스 의 ‘냉소’, 세네카의 ‘절제’, 위 디오니시우스의 ‘부정’, 미켈란젤로 & 칸딘스키의 ‘제거’, 키르케고르의 ‘실존’, 쇤베르크의 ‘무조’(無調), 비트겐슈타인의 ‘침묵’, 포퍼의 ‘반증’, 소로의 ‘불복종’, 바디우와 지젝의 정치공학으로서의 ‘빼기’,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인 ‘심플’과 같은 미덕들이 모두 소크라테스 스타일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시해놓았지만,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소크라테스 스타일은 지난 2천400년 동안 인간의 사유와 삶에 오물이 쌓여 30년 동안이나 청소를 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처럼 악취와 역병이 돌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그것을 청소하고 치유하는 일을 담당해왔습니다. 

이성의 본질과 미덕은 본디 ‘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빼기의 철학과 그것이 낳은 미덕들이 실종되었어요. 그 결과 우리의 사유와 삶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마저도 오염되어 악취와 역병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근래에 경험하고 있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그리고 팬데믹과 기후변화가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습니까?    

△머리말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누구의 시녀도 아니고, 도구화된 물신도 아닌 이성, 진리와 정의를 설계하고 화해와 합의를 이뤄내며 학문과 예술을 창출하던 ‘첫 번째 이성’”(17쪽) 이성을 통해 실천의 차원에서 저항과 비판은 함께 따라오는 것인가요? 칼 포퍼의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라.”(68쪽)도 용기·실천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성(생각)과 실천은 구분된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성과 실천은 분명 구분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빼기’는 사유의 방식이자 동시에 삶의 방식이기에, 그 둘이 구분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빼기라는 사유방식을 자신의 삶에도 적용함으로써, 무엇보다도 부당한 법정의 판결을 따라 독당근즙을 마시고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말(logos)과 삶(bios)이 일치해야 한다는 비판적 태도의 모범을 아테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아테네 시민들의 삶과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에 기여하고자 했지요.

논박술을 ‘소크라테스 게임’이라 칭하는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도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한 네 번째 강연에서 “소크라테스의 게임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설명할 능력이 있는지 여부의 문제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의 삶을 설명할 능력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삶을 설명할 필요조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바와 행하는 바 사이에는 어떤 부조화도 없음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지요”(미셸 푸코, 오트르망 심세광·전혜리 옮김, 『담론과 진실』, 동녘, 2017, 245-246쪽.)라고 소크라테스가 보인 이성과 행동의 일치를 증언했습니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를 아테네 사람들의 정신 속에 있는 억견과 궤변이라는 양쪽 벽을 깨부수고, 알페이오스 강물을 끌어다 페네이오스 강으로 흐르게 하여 악취와 오물이 넘치는 그들의 사유와 삶 그리고 도시국가 구석구석을 청소하려는 파레시아스트(parrhesiast;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라고 규정했지요.

그렇습니다, 이성과 실천, 말과 행동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만으로는 인간과 세상을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이 『유동하는 공포』에서 강조했듯이, 말이 세상을 바꾸려면―진실이 거짓을 이기려면, 이성이 편견과 미신을 극복하려면, 악이 선의 광휘 앞에 굴복하려면, 추함이 아름다움의 눈부심에 퇴각하려면, 요컨대 세상이 정의로워지려면―스스로 자신의 말을 육화(肉化)하는 행동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언어의 육화’가 대체 무엇이던가요? 성서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라고 기록되었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이라 합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도 말씀만으로 인간과 세상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스스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랑과 희생의 ‘행위’를 통해 그 일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신도 인간과 세상을 구하는 일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동원했다면, 하물며 인간이야 자신이 믿는 진리를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는 ‘언어의 육화’ 말고 사람들을 교화하고 세상을 개혁할 방법이 따로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육신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리도전서 13:4∼6)(85쪽)나 “영혼의 상승은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모든 지상의 것을 차례로 떠나는 것, 제거하는 것, 빼내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는 말이다.”(92쪽),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윤리학이 절제, 인내, 경건, 무욕 등을 미덕으로 교훈함으로써 이 전통을 이었다.”(262쪽) 등을 보면, 불교철학의 ‘무’나 ‘공’, 도가철학의 ‘도’가 연상됩니다. 소크라테스의 ‘빼기’와 일맥상통한다고 간주해도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모든 동서고금의 모든 도덕적, 종교적 교훈과 수행·수련의 공통점이 자신의 사유와 삶에서 ‘빼기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저작이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입니다. 슬로터다이크는 700쪽이 넘는 이 책에서 인류의 정신적, 육체적수행과 수련의 역사를 되짚어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이교, 스토아 철학, 그리스도교,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과 철학 등, 동서양의 종교와 문학, 철학에 나타났다 사라졌던 온갖 수행·수련들을 소환해 그것의 본질을 자기 수련의 역사로 조명합니다.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자기 수련이란 다양한 문화들에 속하는 인간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모호한 위험과 죽음의 긴박한 확실성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정신적, 육체적 생존능력―슬로터다이크는 이것을 ‘면역’이라 부른다―을 최적화하기 위한 모든 조작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수행은 그리스어 아스케시스(askēsis)가 의미했던 것, 곧 정신적, 육체적 자기 단련, 훈련, 연습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개념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이라는 사유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논박 통해 우선 상대가 논리적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다시 말해 경건, 절제, 용기, 아름다움, 정의와 같은 미덕들에 대한 편견과 억견을 버릴 수 있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행한 사유방식으로서의 빼기이지요. 그 결과 아테네 사람들이 진실하고 아름다운 윤리적 삶을 살게 함으로써―푸코는 이것이 ‘자기 돌봄’이라 했다―아테네를 진리와 정의가 바로 선 이상적인 도시국가로 변화시키려고 했지요. 이것이 그가 시도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빼기입니다. 따져보면 모든 동서고금의 모든 도덕적, 종교적 교훈과 수행·수련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겠지요.

△‘빼기’의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뺄 대상을 전제로 하는 듯합니다. 조각가가 석상을 만들기 위해 정으로 돌을 쪼면서 조금씩 작품을 완성할 때도, 돌이라는 대상이 있습니다. 냉소에도 냉소의 대상이, 반증에도 반증의 대상인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상을 좋은 것, 올바른 것으로 설정하기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한 건 아닐까요? 필경사 바틀비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라고 했을 때도, 선호하지 않는 대상이 문제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스티브 잡스가 단순화한 대상이 있었던 것처럼이요.  

네, 그렇지요. 제 생각에는 오늘날 우리가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주목해야 하는 빼기의 대상은 편견, 억견, 그리고 궤변을 용인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탈진실(post-truth)의 시대, 개소리(Bullshit)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잠시 살펴보면 명약관화해집니다. 

오늘날 각종 매체와 인터넷에는 날조된 지식과 왜곡된 신념, 숱한 오해와 편견 그리고 황당한 미신과 궤변,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가 홍수처럼 범람하고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그것들이 거짓말을 식은 죽 먹듯 하는 포퓰리스트와 각종 경제적·사회적·정치적·종교적 이익집단에 의해 이데올로기화되어 대중을 기만하며 선동하고 있지요. 근래에는 대통령과 수상 같은 국가 지도자와 각 분야의 지식인들마저 거짓말을―은밀하게 아니라 공공연히, 부끄럽게가 아니라 뻔뻔하게―해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진실이 신발을 신는 사이 거짓말은 세상의 절반을 달릴 수 있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풍자가 이들의 강령이자 신조입니다. 근래 행해진 매사추세츠공대(MIT) 시난 아랄 교수 연구팀의 조사에서도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사이버공간에서 6배가량 더 빨리 퍼지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우리는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더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소리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의 『개소리에 대하여』에 의하면, 개소리는 거짓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진실 또는 진리를 의식하고 그런 척이라도 하지만, 개소리는 그런 것들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해리 프랭크퍼트, 이윤 옮김, 『개소리에 대하여』, 필로소픽, 2019(3쇄), 56~59쪽 참조.) 개소리꾼들은 그것이 거짓말이든 아니든 ‘주구장창 반복해 짖어대면’ 사람들이 그것을 믿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아냈어요. 우스갯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그것은 현대 심리학 및 뇌신경과학의 연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개소리꾼들이 발견한 ‘즐거운 지혜’는 “우기면 된다!”입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가 믿는 그 무엇’이 사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우기고, 9·11 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 우기고, 기후변화가 온실가스 때문이 아니라고 우기고, 말라리아 약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치료제라고 우기고, 백신 접종이 백해무익하다고 우기고, 선거가 조작되었다고 우기고, 우기고, 또 우깁니다.

이제 세상에는 거짓과 개소리가 가득하고, 진리와 정의는 아득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억견과 궤변이 창궐했던 2,500년 전 아테네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다시 살아온다면, 그는 다시 저자거리로 나가 편견과 억견과 궤변을 깨부수는 논박을 통해 탈진실의 시대, 개소리의 시대를 종식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책에서 소크라테스를 다시 소환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빼기를 학습해야 할 시대, 빼기를 행동해야 할 시대가 왔다. 이제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뉴노멀이다.”(520쪽)라고 강조했다. 학습·행동의 방법은 무엇인가? “내적으로는 안락과 사치 및 과시를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불복종하고, 외적으로는 소비물질주의를 강요하는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부당한 요구에 불복종하자는 것”은 사회운동으로 들립니다. 빼기의 철학의 지향점은 세상을 바꾸는 것에 있나요?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을 쓰는 동안 가졌던 저의 꿈은 우리 모두의 사유와 삶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제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흉상이나 그의 잠언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나다니며, 편견과 억견과 궤변을 깨부수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탄소중립 운동에 앞장서기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불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24일, 미국 핵과학자회(BSA)는 지구 종말까지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최후의 심판일(doomsday) 시계’의 초침을 파멸의 상징인 자정쪽으로 10초 더 이동시켰습니다. 이로써 지구 종말까지 남은 시간은 90초로 줄어들었지요. 측정 이래 심판일에 가장 가까운 기록입니다. 그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기후변화입니다. (1947년 자정 7분전으로 시작한 둠스데이 시계는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핵실험을 하던 1953년에는 종말 2분전까지 임박했다가 미소 간 전략무기감축협정이 체결된 1991년 17분전으로 가장 늦춰졌다. 그러나 이후 기후변화를 비롯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19 감염증 팬데믹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술핵 사용 우려가 고조되어 경고 수위를 90초로 높인 것이다.)

“이미 재앙은 닥쳐왔고, 미래는 결정되었다.” “절망할 겨를도 없다.” “최상의 시나리오마저 참혹하고 고통스럽다.” “일상 자체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은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가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우리에게 이미 다가온 기후변화에 의한 재난을 알리려고 울리는 비상경보입니다.(데이비드 월러스 웰즈, 김재경 옮김, 『2050 거주불능 지구』, 추수밭(청림출판), 2020, 39쪽 참조.)

잘 알려졌듯이, 지구는 이미 이산화탄소 한계치인 400ppm을 넘어섰습니다. 때문에 재앙을 피하려면, 늦어도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지요. 그리고 이것은 2015년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의 목표치이기도 합니다. 요구되는 최소한의 목표이지만, 실현 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2019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듯이,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각국의 에너지 정책이 바뀌는 것에서 보듯이, 자국의 이익과 상치하는 경우 협약은 언제든지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후변화가 가져올 또 다른 팬데믹과 사회적 혼란 그리고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빙하가 지도를 바꿀 정도로 빨리 녹아내리는 것을 막지 못하고, 나날이 가속화되고 있는 동식물들의 멸종을 막지 못하고, 해수면이 높아져 바다가 도시들을 집어삼키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인류 자신이 ‘여섯 번째 대멸종’의 희생물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미 지옥문이 열리고 세상이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기후변화로 인해 다가오는 묵시록적 재앙들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태도에서 나왔지요. 과도한 자원과 에너지 소비에 의한 ‘환경오염’, 무분별한 개발에 의한 ‘생태계 파괴’가 불러온 것입니다. 그것은 근대 이후 인류가 만들어 온 세상—특히 지난 50년 동안 진행된 세계화와 후기 자본주의 그리고 그것의 실천 이데올로기인 소비물질주의가 주도해 온 탐욕적 생활 방식과 착취적 경제체제—에서 기인한 것이지요. 때문에 해결책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전 세계를 이미 지배하고 있는 소비물질주의가 조장하고 만들어온 현대인의 탐욕적 생활방식과 각 나라의 착취적 경제체제를 하루바삐 멈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입으로만 떠들 뿐, 그 책임을 실제로 지려고 하는 개인, 기업, 국가는 찾아보기 어렵지요. 일찍이 슬로터다이크가 간파한 대로, ‘우리는 계몽되었지만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감각할 뿐 아니라 아예 무기력해졌지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더위에 지쳐 누운 소처럼, 어떤 경고나 자성에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아테네의 말파리인 소크라테스를 소환해 ‘사유방식의 혁명’, ‘삶의 방식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빼기 혁명은 우리 시대의 요청이자 정언명령(定言命令)입니다. 물론 이 요청, 이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안락과 사치 및 과시를 추구하는 우리의 원초적 욕망을 부단히 극복하고, 소비물질주의를 강요하는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부당한 요구에 과감히 저항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편견과 이기심 그리고 자국우선주의를 뛰어넘어 글로벌 연대를 구축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온갖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장벽을 쓰러트려 다리로 만들어야 하는 일이지요. 우리의 사고와 삶을 옥죄어온 무겁고 단단한 돌덩이들을 하나씩 부정하고 깨부수고 제거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때때로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뿐만 아니라 『생각의 시대』 등 저서를 보면, 문학부터 철학·신학·과학 등 방대합니다. 책은 어떻게 얼마만큼 읽으시나요? 인터넷 시대에, 책 읽기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본디 다독가도 아닌 데다가, 이제 나이가 많고 눈이 어두어서 책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는 문학·철학·신학·과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류문명은 문자를 사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자가 사용이 일반화 되면서 책이 만들어졌고, 책은 말과 달리 정보 전달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가능하게 했지요. 또한 반추(反芻) 하면서 깊이 사고할 수 있게도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변혁이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라고 이름 지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에 일어났지요.    

그러자 인류의 정신이 갑자기 총체적으로 변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인간 정신의 전체적 변혁을 ‘정신화(Vergeistigung)’라고 이름 붙였는데, 인류가 비로소 정신적 존재로 바뀌었다는 뜻이지요. 오늘날 눈부시게 발달한 뇌신경과학을 통해 차츰 드러났지만, 이것은 인류의 뇌에 새로운 신경망이 구축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인류가 그 이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뇌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뇌가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뇌신경과학자들에 의하면 문장이 아이들의 뇌를 구성(setting)하며 성인들의 뇌를 재구성(resetting)합니다. 그리고 모든 비판적 사고가 바로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지요. 이 말은 인터넷 시대라고 해도 문장을 통해 정신을 구성 또는 제구성하며, 또 비판적 사고를 훈련시켜주는 책 읽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로마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에 의하면, 로마의 귀족들은 바른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 유모를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특히 새겨들을 만한 말이지요.

△1) 생각의 시대 2) 이성의 시대 3) 융합의 시대 중, 이성의 시대 팡파르를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열었다. 추후 작업은 어떻게 이어지나요?

이성의 시대는 본디 ‘소크라테스 스타일’, ‘플라톤 스타일’, ‘아리스토텔레스 스타일’ 3권으로 기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이란 저자 혼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와 함께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출판사는 기업이기 때문에 수익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스타일』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송철학상을 받는 영예는 안았습니다만, 판매가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모릅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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