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07:55 (목)
김구 연구 새 轉機 … 한·중 관계 공백 메워질 듯
김구 연구 새 轉機 … 한·중 관계 공백 메워질 듯
  • 이규태 관동대
  • 승인 2006.09.09 0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참관기_ 김구 선생 탄생 1백30주년 학술대회(중국상해복단대학, 2006. 8. 29)

지난 8월 29일 백범 김구 선생의 탄생 1백3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복단대 한국연구센터에서 개최됐다. 복단대 한국연구중심은 북경대, 연변대, 절강대의 한국연구중심과 함께 중국에서 한국문제를 연구하는 가장 중추적인 대학 연구소 중 하나다.

이번 대회에는 중국에서 김구, 한국독립운동, 임시정부를 연구하는 상해, 절강성, 강소성 지역의 중국학자 26명과 한국, 일본학자들이 참여해 총 10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규모는 작았지만 김구의 27년에 걸친 중국에서의 항일활동을 중국학계의 관점에서 분석해 의미는 컸다. 중국에서 김구의 항일독립운동은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 동시에 시작됐고 일본항복 후 1945년 11월 미군정부의 요구로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귀국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당시 김구는 반공산주의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는 김구를 “한국독립운동사상의 위대한 영수”로 칭송하면서 탄생 1백3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를 공개적으로 진행한 점에서도 주목할만 했다.

크게 3개의 전문주제로 나뉘었다. 첫 번째 주제는 김구와 한·중 관계를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총 4편의 논문이 발표됐는데, 먼저 졸고인 ‘백범과 한중관계’는 김구와 임시정부, 그리고 중국국민정부의 관계를 한국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으로 한·중의 정치적 관계와 군사적 관계로 나누어 살펴봤다. 두 번째 논문은 謝俊美 화동사범대 교수가 발표한 ‘김구와 중국국민당의 관계’(金九與中國國民黨交往述論)였다. 사 교수는 1932년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23년간 중국국민당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지원 상황과 문제점을 분석했다. 특히 국민당의 내부 파벌투쟁과 외교전략에 따른 임시정부와 김구에 대한 지원의 한계, 문제점들은 청나라가 조선을 통제하려던 중국정치인들의 대한반도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그러한 인식의 그림자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한반도정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점은 주목할만 부분이었다.

 세 번째 논문은 邵雍 상해사범대 교수가 발표한 ‘김구와 중국공산당’(金九與中國共?黨)으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를 지지했던 중국공산당의 인식과 태도를 당시 공산당이 발행했던 각종 신문자료와 문서에 근거해 분석했다. 중국공산당의 김구에 대한 태도를 반공의 이념적인 범주보다는 항일애국주의의 관점에서 시도한 것으로, 과거에는 논하기가 어려웠던 부분이기에 큰 의미가 있다. 네 번째 논문은 정두음 절강대 교수의 ‘김구와 국민당엘리트계층’(金九與國民黨精英階層)이었다. 이 논문은 문화사상의 관점에서 김구와 국민당의 주요 엘리트 사이의 상호관계를 논한 것으로 각종 자료를 통해 문화철학사상에서 상호일치하고 있었던 점을 국민당의 그처럼 김구를 지원할 수 있었던 주요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백범 김구
두 번째 전문주제는 김구의 중요 활동지였던 상해와 중경에서의 활동에 대한 연구였다. 상해지역 활동에 관련해서는 馬長林 상해시 문서보관소 교수의 ‘김구의 상해시기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공헌’(金九在上海期間對韓國獨立運動的貢獻)과 蘇智良 상해사범대 교수의 ‘상해에서 김구’(金九在上海)가 발표되었다. 이들 논문에서는 계파갈등, 재정문제, 외교정책 실패로 조직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상해임시정부가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존속하기까지 김구의 노력과 과정을 상해시 당안관과 각종 언론자료들을 통해 논하고 있다. 다음으로 중경에서의 활동은 石建國 상해사범대 교수가 발표한 ‘김구와 중경시대항일독립운동’(論金九與重慶時代的抗日複國獨立運動)이었다. 석 교수는 중경에서 임시정부를 “김구 시대”로 규정하고, 김구가 주도한 광복군의 조직과 좌우합작 실현의 배경을 분석했다. 또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외교의 실패문제를 국민정부의 국내외정책, 임시정부의 내부계파투쟁의 관점에서 상세하게 분석한 점이 돋보였다.

세 번째 전문주제는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연구로 주목받았다. 김구와 관련된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이어졌는데, 崔志鷹 동제대 아태연구중심 교수의 ‘김구와 항국항일독립운동좌익과의 관계’(金九與韓國反日獨立運動左翼派別的關係)는 항일독립시기 사실상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좌우파 정치투쟁과 유사했던 임시정부 내에서 김구와 좌파의 계파간 관계를 분석했다. 이어서 傅德華 복단대 교수는 당시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신문이었던 ‘新華日報’에서 김구에 대해 보도한 자료를 분석한 ‘신화일보의 김구 관련 보도 논평’(‘新華日報’ 有關金九報導述評)을 발표했다. 당시 공산당의 기관지였던 신화일보가 반공노선을 취한 김구에 대해서는 많이 보도하진 않았지만, 상당히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石源華 복단대 한국연구중심 주임교수의 ‘김구와 한국임시정부주중국특파단’(金九與韓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은 대만의 국민당문서보관소와 중국대륙의 각종 원시자료를 활용해 당시 한중관계의 내용과 특색을 연구한 매우 의미있는 논문이었다. 논문에서 석 교수는 1945년 11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김구가 귀국하면서 중국측과의 연락과 교민업무처리를 위해서 남기고 간 ‘임시정부주중국특파단’의 성격과 활동내용 및 국민정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당시 장개석 국민정부의 대한국정책의 주요 내용을 분석했다. 이 논문에서 활용된 문서들은 1945년말에서 1947년 사이의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들이다. 근현대한중관계의 연구에서 이 시기 중화민국과의 관계는 공백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논문의 의미는 더욱 크다. 임시정부의 해체, 이승만과 김구의 경쟁관계, 미국과 중국의 관계의 갈등,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정부의 내전 등 매우 복잡했던 국내외 정세로 인해 사실상 공백 상태로 변한 한중관계가 김구의 개인적인 위상과 당시 ‘임시정부주중국대표단’의 박순, 민필호 등의 활동을 통해서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활동은 한중관계사의 맥락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자료비공개나 정치적 이유로 사실상 연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회의의 의미와 향후 이 분야 연구과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중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자료들이 많이 발굴, 출판되지만 이들 자료를 종합, 정리하는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당시 재중국항일독립운동이 만주, 상해, 중경지역, 혹은 공산당이 위치했던 연안으로 분산돼있다. 또한 한중관계가 정상화 된 것이 겨우 20년 밖에 안됐기에 연구기간이 짧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사실 1980년대 이전에는 한중관계가 북한과 중국 관계, 한국과 중화민국의 관계로 양분돼 있었기에 자료발굴도 어려웠다. 앞으로는 정치적 한계를 벗어나 한국, 대만, 중국대륙, 북한을 연계하는 공동연구나 자료 발굴이 더욱 필요하다.

두 번째는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언어장벽의 문제다.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한국학자들이 중국어 자료를 볼 수 없고, 대부분 중국학자들이 한국어 자료를 볼 수 없다는 언어장애를 극복할 수 있도록 자료번역이 이뤄지거나 혹은 서로 상대국의 언어를 배우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 번째는 정치적 요인의 극복문제다. 남북한관계에서 이념차이로 남북한에서 김구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다르며, 한국에서 좌파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 역시 북한과 완전하게 차이가 난다. 이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남북의 시각차는 여전히 크다. 회의를 마무리 하면서 석원화 교수는 “이러한 남북한의 정치이념적 요인과 연구한계를 중국학자들이 중국이나 대만에 있는 자료들을 발굴해 더욱 객관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일종의 중재역할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넷째, 중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이나 한중관계의 연구가 지역적 정치적 특색이 여전히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독립운동의 연구도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김구와 임시정부의 연구, 만주지역과 북경의 학자들이 중심이 된 만주지역항일운동이나 동북공정의 연구 등이 그러한 것이다. 또한 한국이나 대만에서 더 이상 한국과 대만의 상호관계를 연구하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중국과 남북한의 관계만이 한중관계가 아니고, 1992년까지 중화민국(현재 대만)과 한국관계, 현재의 대만과 한국관계도 한중관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이 임시정부를 지원한 사실은 엄연한 한국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8월 단교 이전의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논하는 부분에서도 ‘중화민국’이라는 호칭사용도 회피하는 한국 학계나 정부 혹은 언론의 ‘중국 눈치 보는’ 현실은 한국의 대중국인식의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반공노선을 견지한 김구와 당시 중화민국 즉 국민정부의 관계를 학술적인 차원에서 자료를 발굴하고, 호칭용어까지 그대로 사용하면서 객관적 토론으로 이끌어냈던 중국 대륙학계의 학술적 자세는 매우 의미가 컸다.

이규태 / 관동대·중국정치외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