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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트스 열전 142] 미국의 아나키즘은 벤저민 터커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박홍규의 아나키트스 열전 142] 미국의 아나키즘은 벤저민 터커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 박홍규
  • 승인 2023.05.1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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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터커
벤자민 터커. 출처=위키피디아
벤저민 터커(1854– 1939). 출처=위키피디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이자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자로서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믿은 벤저민 터커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라는 책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미국 대표인양 고드윈(영국), 프루동(프랑스), 슈티르너(독일)와 함께 다뤄지지만, 그가 과연 그렇게 비중 있는 아나키즘 사상가인지는 의문이다. 그가 프루동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미국 사상가였지만 고드윈이나 프루동이나 슈티르너에 비교될만한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가 그 세 사람을 참고하고 종합하여 미국의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더욱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지만 미국 아나키즘은 소로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옳고, 20세기 미국 아나키즘은 엠마 골드만에 의해 개화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터커는 아나키즘은 철학의 체계가 아니라 '정치적 및 사회적 생활의 기본 원리'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아나키즘을 퍼뜨리는 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마지막 생애 30년 동안 그는  아나키즘의 전망을 비관했기 때문에 평생 일관된 아나키스트였다고 할 수 없다. 터커를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미국 대표로 보는 견해는 사실은 그를 자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오해하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오해다.

 

벤자민 터커, 30년을 아나키스트로 살다 

터커는 1854년에 태어나 1939년까지 85년의 생애를 살았다. 25세부터 55세까지 30년을 아나키스트로 살았고, 나머지 30년은 외국에서 침묵하며 살았다. 터커는 1854년 매사추세츠 주 사우스 다트머스에서 부유한 자유주의자와 급진적 개신교인 퀘이커 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페인주의적 개인주의를 물려받았다. 퀘이커는 사람들이 선출된 지도자 없이도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고 각자는 친교 자치체에서 이성의 빛을 따른다고 확신하게 했다. 퀘이커 학교에서 배운 뒤 MIT에서 공부한 2년 째 18세가 된 1872년 뉴잉글랜드노동개혁연맹에 가입하고 워렌 등의 아나키스트들의 연설을 듣고 그들과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당시 그는 우드헐과 헤이우드의 아나키즘에 심취했다.

1877년 프루동의 <재산이란 무엇인가>의 영역판을 내어 아나키즘 세계에 등장한 터커는 같은 해 <래디컬 리뷰>라는 잡지를 냈으나 재정난으로 4호로 끝났다. 그 뒤 신문기자로 살면서 돈을 모아 1881년부터 1908년까지 역사상 최고의 아나키즘 잡지로 평가되는 <리버티>를 간행했다. 개인주의 아나키스트들의 중심이 된 그 잡지는 니체와 버나드 쇼를 미국에 소개하고 체르니셉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를 번역해 소개하고, 오스카 와일드, 허버트 스펜서, 에밀 졸라 등의 작품도 소개했다. 크로포트킨은 터커의 개인주의에 대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터커의​​ 강력한 국가 비판과 그의 강력한 그의 개인 옹호에 박수를 보냈다.

1892년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이사한 터커는 1906년에 "철학의 에고이즘, 정치의 아나키즘, 예술의 우상파괴주의"를 홍보하는 서점을 열었으나 2년 뒤 화재로 불타 인쇄 장비와 30년 동안 모은 책과 자료를 잃었다. 그 뒤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가 제1차대전이 터지면서 영국으로 가서 크로포트킨과 마찬가지로 평소의 평화주의 원칙을 깨고 연합군을 지지했다. 만년에 아나키즘의 전망을 비관한 그는 1930년에 중앙집중화와 기술의 진보에 의해 아나키와 문명 모두가 파멸했다고 주장했다. 1939년 터커는 20년을 살았던 모나코에서 85세로 사망했다.

벤저민 터커가 간행한 잡지 <리버티(Liberty)>. 출처=위키피디아

 

‘가장 완벽한 사회주의’는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터커는 요한 모스트와 같은 공산주의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행동에 의한 선전’을 거부하고 노동자들이 파업 등을 통해 비폭력적으로 자본주의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엠마 골드만은 공산주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터커의 태도가 '모욕적인 원한을 품고 있다'고 불평했지만, 터커는 우익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좌파로 남았다. 터커는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했으며 자유시장 사회주의와 그가 아나키스트 또는 아나키스트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리버테리안 사회주의의 지지자이자 상호주의의 추종자였다.

그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학파 사회주의자들의 고전경제학과 워렌, 마르크스, 프루동의 경제학을 사회주의에 연결했고, 만년에는 슈티르너의의 에고이즘으로 개종했다. 국내외에 터커를 아나키 자본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터커 자신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믿음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다. 생애가 끝날 무렵 터커는 아나키즘을 비관했음에도 "자본주의적 신문이나 부르주아 신문에 글을 쓰는 것은 최악의 매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자본주의를 싫어했다.

‘가장 완벽한 사회주의’는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 그는 최악의 독점과 모든 특권의 중심인 국가를 포함하여 모든 독점의 파괴를 요구했다. 모든 정부는 침략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전제적인 반면 아나키즘은 '인간의 모든 일은 개인이나 자발적인 결사체에 의해 관리되고 국가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교리'라고 주장한 그는 사람과 재산을 보호하는 경찰 기능도 자기 방어를 위한 자발적 집단과 협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터커는 모든 개인의 권한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제한되고 결국에는 평등한 자유가 우세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아나키즘을 위한 사회적 편의의 기본 법칙은 '자유의 평등과 양립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어떤 도덕규범도 개인에게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그는 유일한 도덕법은 "자신의 일에 신경 쓰라"이고 유일한 범죄는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나키스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의미의 이기주의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는 개인이 이성, 설득, 보기, 여론, 사회적 배척 및 방해받지 않는 경제력의 영향을 통해 이웃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정부의 소유권을 거부한 터커

그는 많은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을 종합했다. 가령 고드윈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가져오는 계몽의 점진적인 확산을 기대한 그는 무저항이 보편적인 규칙이 될 것을 호소했으나 지배와 방어를 구별하고 다른 사람의 침범에 대한 저항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워렌과 마찬가지로 계약을 집행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고, 개인과 집단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형을 비롯한 모든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프루동과 마찬가지로 학교, 협동조합, 은행 및 노동조합과 같은 대안 기관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궁극적으로 대규모 시민 불복종과 총파업은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조직의 자연스러운 패턴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상으로 자유 사회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영원의 균형을 위한 보편적 진보의 완전한 표현'을 예측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쿠닌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에 동의하지는 않고 시장을 인정했는데,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시장에 의존하는 유일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고 전자본주의 경제나 사회주의에도 시장은 있다. 터커는 마르크스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시장 사회주의, 특히 자신의 개인주의 아나키즘에 영향을 준 프루동의 상호주의를 인정했다.

터커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많은 사회적 아나키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왜곡되지 않은 자연적 자유 시장에서의 재산 분배를 이기적 충동의 매개자이자 자유시장 사회주의 체제에 뿌리를 둔 사회적 안정이라고 옹호했다. 터커는 처음에 개인이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는 자연권 철학을 선호했지만, 계약에 의해 무효화될 때까지는 힘의 권리만 존재한다고 믿는 슈티르너의 영향을 받아 에고이즘에 찬성하면서 자연권 철학을 포기했다. 모든 유형의 공산주의만이 아니라, 무국가 공산주의도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믿고, 대신 모든 조직의 자발성을 주장하며, 강제적 성격을 이유로 한 결사 및 다수결과 조직화된 종교 및 결혼 제도를 거부했다.

국가 통제가 독점의 가장 완전하고 가장 불쾌한 형태이기 때문에 정부 소유권을 거부한 터커는 폭력적 수단에 의한 국가 전복을 용납하지 않고 광범위한 교육과 납세 거부, 배심원 의무 및 병역 회피, 강제 불이행과 같은 형태를 취하는 수동적 저항을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관료적 조직이 아니라 비용 원칙에 따라 생산과 분배를 계속하는 결합인 노동조합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헨리 조지의 단일세에 대해서도 그것이 국가사회주의라는 이유에서 반대하고 그것에 반하는 사회주의가 자신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이라고 했다.

터커는 자신이 사유재산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재산은 도둑질'이라는 프루동의 사상을 지지했다. 터커는 소유를 옹호했으나, 사유재산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유 재산의 토지 사용(그는 이를 ‘토지 독점’이라고 불렀다)을 자본주의의 4대 악 중 하나로 간주했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야경 국가 또는 민간 보안군이 시행하는 법률에 의해 보호되는 절대적 재산권을 옹호하는 머레이 로스바드와 같은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직접적으로 반대된다.

터커는 신용과 통화를 창출하는 은행의 독점이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독점이 사회에 해롭다고 생각했지만 은행 독점은 산업 자본주의와 지주 독점이 성장하고 그것 없이는 시들고 죽을 뿌리이기 때문에 최악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신용이 독점되지 않는다면 그 가격(이자율)은 훨씬 더 낮아질 것이고, 이는 다시 자본재, 토지, 건물, 즉 일반적으로 신용 없이는 구매할 수 없는 값비싼 품목의 가격을 크게 낮출 것이기 때문이다.

터커는 자본 장비를 소유한 사람과 장비를 사용하기로 계약한 사람 사이에서 그는 부가가치가 공평하게 분배되는 비착취적 관계를 구상했다. 상호 신용을 통해 노동자의 교섭력을 증가시키려는 제안으로 그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노동자의 통제와 양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촉진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즉 작업장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얻을 수 있으며 신용 구매를 풀고 공동으로 회사를 소유할 수 있게 하고 사유 재산과 임금 노예제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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