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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8]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조셉 라바디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8] 시인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조셉 라바디
  • 박홍규
  • 승인 2023.05.10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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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라바디는 다음 시 ‘제국주의’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근본을 노래한다.

 

나는 제국주의자,

나 자신의 황제,

나의 에고는 다른 누구도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의 제국.

나만이 내 의식의 영역에서 황제.

이 특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찬탈자.

나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자는 나의 적.

내 영토의 침범자는 친절을 바랄 자격이 없고 그의 재산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 제국은 나 자신의 일로 바쁘고

그래서 나는 그 영역과 관련 없는 일에 손을 댈 시간이 없다.

정당하고 공정하며 정직하게 내 자신에게 부담을 더할 의향이 없다.

내 제국은 다른 제국과 다르다.

가능한 한 광산은 스스로 결정하는 실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아무도 그곳을 침범하지 못한다.

나는 모든 침략자의 적이며 그 누구의 침략자도 아니다.

자기 일을 생각하고 내 일을 내게 맡기는 모든 자로 더불어 화목하라.

 

조셉 라바디(Charles Joseph Antoine Labadie, 1850–1933) 

위 시는 조셉 라바디가 50세부터 쓴 500수의 시 중 하나다. 아나키스트 시인 조셉 라바디(Joseph Labadie)는 1850년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 강 양쪽에 정착한 17세기 프랑스 이민자 가족의 후손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예수회 선교사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통역사로 봉사했던 미시간 남부의 포타와토미 부족과 함께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유일한 정규 교육은 교구 학교에서의 몇 달이었다. 18세 이전부터 인쇄공으로 일했고 22세에 디트로이트 신문사들의 인쇄공이 되었다.

1877년, 27세의 라바디는 디트로이트에서 새로 결성된 사회주의노동당에 가입했으며 사회주의의 원리를 설명한 <디트로이트 사회주의자>를 인쇄해 배포했다. 그는 또한 디트로이트 인쇄공 연합 18의 회원이었으며 1878년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국제 인쇄공 연합 대회’의 두 대표 중 한 명이었다. 1878년에는 디트로이트 최초의 노동기사단 회의를 조직했고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1880년부터 그는 전국의 여러 노동신문에 칼럼을 계속 집필했다. 1883년 라바디는 비폭력 교리인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교리의 미국 주창자인 벤저민 터커의 잡지인 <리버티>에 자주 글을 썼다. 또한 엠마 골드만과도 친교를 맺었다.

라바디는 국가의 억압이 없다면 인간은 “이자, 이익, 임대료 및 세금을 통해 동료를 강탈하지 않고 ... 위대한 자연 법칙과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지역의 공공 협력을 지원했으며 상수도, 거리 및 철도에 대한 지역 사회 통제를 옹호했다. 또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헤이마켓 아나키스트들의 전투적 아나키즘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폭력의 유일한 가해자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들의 사면을 위해 싸웠다. 라바디는 노동기사단의 대표가 피고인들의 사면에 반대하자 노동기사단을 탈퇴하기도 했다. 1888년 라바디는 미시간 노동연맹을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새무얼 곰퍼스(Samuel Gompers)와 동맹을 맺었다.

새무얼 곰퍼스(Samuel Gompers)
새무얼 곰퍼스(Samuel Gompers)

1900년, 50세에 그는 시를 쓰고 손으로 만든 예술적인 소책자를 출판하기 시작했다. 1908년 시 우체국 검사관은 아나키스트 인용문이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는 이유로 그의 우편물 취급을 거부했다. 한 달 후 라바디가 점원으로 일했던 디트로이트 수도 위원회는 아나키즘적 감정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그러나 당해 공무원들은 디트로이트 시민들에게 ‘젠틀 아나키스트’로 잘 알려진 라바디를 지지하는 대규모 대중 시위에 직면하여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60세였을 때, 라바디는 자신의 집 다락방에 모아둔 방대한 양의 팸플릿, 신문, 서신을 보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이 컬렉션은 미국의 노동 및 사회주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의 최고 저장소 중 하나인 위스콘신 대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간절히 원했지만 미시간 대학교에 연락했다. 대학측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주민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기부되었다. 그가 남긴 노동시 ‘어리석음의 신’을 읽어보자.

 

나는 노동.

나는 불안한 지구의 모든 분주한 부분에 있다.

나는 흙과 바다처럼 전지전능하고 사람처럼 전지전능하다.

나는 지혜는 작지만 크다.

나는 세상의 사치품을 만들고 필수품에 굶주린다.

나는 내가 지은 오두막집에 사는 것에 대한 찬사로 궁전을 짓는다.

나는 땅의 젖을 짜고 게으름은 크림을 마신다.

나는 철도와 떠다니는 궁전을 만들고 독점에서 거부된 기회로 걸어가는 발에 물집을 잡는다.

나는 모든 것을 생산한다. 나는 모든 일을 한다. 나는 지친 머리를 둘 곳이 없다.

그리고 굶주림은 내 생명을 먹고 뼈뽑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왜?

모르겠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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