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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13회) 문화대혁명과 등소평
이중의 중국산책 (13회) 문화대혁명과 등소평
  • 이중 전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9.0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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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의 공포', 독재정치가 가능했던 진짜 이유

중국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중국이 무너지기를 바란다. 옛날 소련식 국가분열 같은 것을 기대한다. 중국을 깔보는 사람들은 아예 그런 전망 속에서 내일의 중국을 바라본다.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과, 신강, 티베트 등의 독립 같은 것에 희망을 건다. 한국의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중국의 해체 같은 것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중국의 언론통제가 심하여 대륙에서 일어나는 분열적 징후들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종국에는 중국도 옛 소련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다. 적어도 2008년 북경 올림픽까지는 견디어내지 않을까 하면서, 그 이후를 기대하는 시각들도 있다. 어찌 되었든 현재로는 특별한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보일 리가 없다. 왜 인가 하고, 그 이유를 중국전문가도 아닌 내게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등소평의 논평과 의미부여를 상기시켜 준다.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반면교사로서의 문화대혁명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미증유의 대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개혁개방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중국 공산당이 독재를 하도록 보호해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외국에서 과대평가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적 성공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내란에 대한 두려움이다”

‘중국이라는 거짓말’(홍상희 박혜영 옮김, 문학세계사)을 쓴 기 소르망의 말이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소르망은 2005년 한 해 동안 중국 전역을 돌며 비판적인 중국사람들과 만나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소르망은 “내란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오늘의 중국의 안정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 빈부 격차 등 산적된 문제에도 불구하고 용케 버티고 있는 중국 정치의 안정적 기반에 대하여 이 이상의 적절한 말이 따로 없다.

중국이 곧 무너지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 머잖아 옛 소련처럼 조각조각 박살이 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르망의 말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소르망이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의 민주주의자들, 폭정에 항거하는 이들 저항인들의 말에 나는 일 년 동안 귀를 기울였다. 이 책을 펴내는 것은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였다”고 스스로 말했듯이, 중국에 대한 극심한 반대 내지는 비판자들이었다. 중국 경제마저 허구로 보는 소르망이다. 경제성장이 중국의 권위주의 정권을 지탱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면, 중국은 왜 무너지지 않는가라는 의문에 부딪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내란에 대한 두려움’을 외국인들이 실감할 리가 없는 데도 소르망은 용케 꼬집어내고 있다.

중국의 근세사에서 요즘처럼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세월도 흔하지 않다. 청나라 말기의 중국인이 당한 모욕은 이미 역사의 교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엄청난 내란이었던 문화대혁명, 그 수렁의 의미를 중국인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모택동의 건국신화는 오히려 문화대혁명이라는 내란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느낌이다. 앞으로 상상 밖의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신화는 쉽게 빛이 바래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저질렀던 문화대혁명의 혼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모택동 신화와 중국공산당 체제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모택동은 중국인들에게 병도 주고 약도 준 특이한 존재다.

다시 모택동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리더십과 그를 이은 등소평의 리더십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공자의 師와 德, 진시황의 君과 業을 겸비한 제3형 인간형이라는, 모택동에 대한 평가는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엄청난 비약일 수 있다. 이런 논리를 100% 수긍하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연구서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중국은 가지고 있다. 모택동의 공이 10이 아닌, 7로 격하되었다고는 하지만, 성공한 혁명가이며 뛰어난 이론가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중국인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정서적으로 접근할 때엔 더욱 그렇다. 한족 중심의 거대한 통일국가, 강한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다급하게 달려가는 공산 중국의 오늘과 미래의 중심에 모택동이라는 역사적 상징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역사상 가장 강성했을 때의, 강희제가 닦아놓은 변방을 그대로 유지하고, 50여 소수민족을 거느린 오늘의 중국은 그들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강대하다. 대만 하나만을 아직 온전하게 손에 넣지 못한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중국에 있어서 대만이란 존재는 특이하다. 단순히 지정학적인 논리만으로 접근할 수도 없고, 군사적인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특수한 존재이다. 대륙 정권의 자존심과, 그 정권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강희제는 대만을 손에 넣고 나서야 골치 아픈 변방 몽골에 대한 정벌에 나설 수 있었다. 연후에 러시아와 협상하여 국경문제에 진전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대륙정권의 안정을 위한 수순이었다.

솔즈베리는 모택동을 ‘고집불통’과 ‘융통성’을 겸비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민주인사’ 앞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면서 측근들에게는 무례하게 대하는 것이나, 이백을 치켜세우고 두보를 깎아내리면서도 두보의 시를 줄줄 외우는 등, 그의 특이한 면모는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모택동은 ‘원칙성’과 ‘영활성(靈活性)’이란 말을 자주 썼다. 소련의 흐르시쵸프에게 등소평을 소개하면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등소평 동지는 원칙성도 강하지만 영활성도 아주 뛰어난 지도자이다”

모택동의 주의 주장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도 등소평이 지향하는 것은 모택동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번이 모택동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가 다시 기용되곤 했다. 등소평 영활성의 결정판이 바로 개혁개방이다. 모택동 사후, 한때 권력을 쥐었던 華國峰처럼 등소평이 ‘모택동은 다 옳았다’고 모택동을 맹신했더라면 오늘의 등소평과 개혁개방은 없었을 것이다. 모택동이 말한 “혁명은 굴곡”이란 말이나, “革命不忘妥協 妥協不忘革命”이란 말을 사실상 실천에 옮긴 지도자가 등소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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