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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그라스의 괴로운 고백
[문화비평] 그라스의 괴로운 고백
  • 김학이 동아대
  • 승인 2006.09.01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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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귄터 그라스가 ‘무장 친위대’ 전력을 고백했다. 나치 독일 최강의 권력기구였던 친위대는 홀로코스트를 기획하고 실행한 조직이었고, 무장친위대는 그 전위였다. 예컨대 1941년 여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 정규군을 뒤쫓으면서 단 6개월 만에 약 7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자들이 바로 무장친위대였다.

게다가 그 친위대는 나치 독일의 ‘신귀족’임을 자임했다. 친위대원이 되려면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했으니,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리아 혈통 증명서는 최소 조건이었다. 그라스는 설명했고, 역사가들은 그 설명의 정확성을 입증했다.

무장친위대는 그가 입대하기 1년 전에 이미 엘리트 조직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10만 명에 이르는 소련인을 포함하여 무려 25만 명의 외국인이 무장친위대에 편제되어 있었으며, 그라스가 속한 ‘프룬스베르크 탱크사단’은 ‘사단’은 물론 일반 ‘군부대’의 이름에 전혀 미치지 않는 오합지졸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부대가 재편되던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었고, 노르망디와 네덜란드와 동부전선에 연속해서 배치된 그 부대는 제대로 된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라스는 친위대가 뭔지도 몰랐고 단 한 건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라스의 설명은 낯익은 것이다. 나치 전력자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했다. 전직 독일총리 키싱거가 그랬고, 발트하임이 그랬으며, 심지어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 섰던 나치도 그랬다. 이는 물론 변명이다. 나치즘이라는 과거에는 구체적인 범죄의 차원 외에 동시대를 살았던 자가 떠안아야 하는 책임의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스가 그렇게 변명한 것은, 그 역시 동참해온 독일의 과거청산 작업이 나치와 비(非)나치, 악과 선이라는 이분법적 계몽에 입각하고 있었고, 그라스 스스로도 그러한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라스에게는 다른 차원이 있다. 그는 어쨌거나 나치 전력을 고백한 것이다. 그의 고백이 얼마나 큰 윤리적 용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그가 속했던 탱크 사단의 기록이 독일 연방군사기록원에도 거의 없다는 사실, 따라서 그가 함구했으면 역사학조차 그의 전력을 발굴해내지 못했으리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는 그라스에 못지않은 명성을 쌓은 다른 좌파 지식인들과 비교하면 더욱 극명해진다.

몇 년 전, 내노라 하는 독일의 사회사가 대부분을 제자로 생산한 역사가인 테오도르 쉬더와  베르너 콘체가 나치의 동유럽 인종재편, 즉 홀로코스트의 기획에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있었다는 학문적 증거가 제출되었다. 나치즘 연구에 획을 그은 역사가이자, 필자가 사숙한 스승 중의 하나인 마틴 브로샤트 역시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사후에 밝혀졌다.

 그들과 구분되는 그라스의 윤리적 용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의 역작 ‘양철북’에서 그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작품의 위대성은 1959년이라는 그 이른 시기에, 나치즘이 일상의 ‘작은 사람들’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사람들과의 일상적 공모 속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을 탁월하게 형상화하였다는 데 있다. 나치즘의 복합성을 통찰한 작가였기에 그라스는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식할 수 있었고, 그의 고백은 독일의 과거청산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는 ‘행위(act)’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라스의 고백을 바라보는 올바른 자세는 변명하는 그라스와 책임지는 그라스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 역사학계의 현재는 정반대다. 1986/87년에 벌어졌던 소위 ‘역사학자 논쟁’의 재판(再版)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역사가들이 한목소리로 그라스를 비난한 반면, 사민당 계열의 역사가들이 일제히 그를 옹호하고 있고, 이를 지켜보는 일반인들은 “모두 똑같다”고 냉소하고 있다. 선악의 이분법과 그로 인한 냉소주의는 과거를 정상화시키지 못함은 물론, 현실에 대한 순응주의를 낳고, 또한 인간의 윤리적 차원을 말살시킨다. 그라스에 대한 일방적인 옹호와 비난은 동일한 차원에 있다. 그것은 우리를 한 치도 진전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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