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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6]  “천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했던 아나키스트 루시 파슨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36]  “천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했던 아나키스트 루시 파슨스
  • 박홍규
  • 승인 2023.04.2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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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빙>은 1958년 버지니아에서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이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1년 형 판결을 받고 형 집행 면제 조건으로 25년을 다른 주에서 살게 된 뒤, 오랜 재판 투쟁 끝에 1967년 연방대법원에서 결혼금지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아내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부부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1950년대까지 24개 주에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악랄한 인종차별 노예법으로 고통받았다.

20살 이상 연상인 흑인 해방노예와 결혼했던 전력이 있던 루시와, 엘리트 백인인 앨버트의 사랑은 <러빙>만큼 감동적이다. 당시 미국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은 금지됐다. 특히 남부에서는 흑백분리법이 강력하게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신혼부부는 시카고 빈민촌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은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나, 앨버트가 몇 차례의 선거에서 실패한 뒤 아나키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 참여했으며, 헤이마켓 시위도 주도했다.

루시 파슨스. 출처=위키피디아

아나키스트 앨버트와의 결혼

루시는 1851년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백인 남성 톨리버로 짐작되고, 어머니는 그의 노예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었으나, 생전에 루시는 자신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자녀임을 부인하고 부모가 멕시코 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어두운 안색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을 ‘스페인-인도 처녀’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1863년 남북전쟁 동안 톨리버는 노예들과 함께 텍사스 주로 이주하여 1863년 1월 1일을 모든 노예가 해방되는 날로 정한 노예해방령의 시행을 피했다. 텍사스로 이주한 후 루시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녀는 백인 가정을 위해 재봉사와 요리사로 일했다. 그리고 1870년 이전에 노예였던 남자와 한동안 함께 살며 아기를 낳았으나 사망했다.

1871년에 앨버트 파슨스와 결혼했다. 잠시나마 대학을 다닌 앨버트와 달리 루시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었으나, 남편과 함께 <알람>이라는 신문을 창간해 아나키즘 운동을 독려했고, 여러 차례 연설을 했다. 헤이마켓 시위 후의 연설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폭탄 투척을 부인하면서 아나키즘은 폭탄과 횃불을 든 사람이 아니라 평화롭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며, 아나키란 혼돈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고 역설하면서 굶주리는 빈민과 노숙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낳은 사회가 온존하는 한 아나키스트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앨버트 파슨스. 출처=위키피디아

남편이 처형당한 뒤에도 루시 파슨스는 자신의 운동을 더욱 강고히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1888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는 윌리엄 모리스, 표트르 크로폿킨과 함께 연설했다. 루시 파슨스는 언론과 저술 활동을 통해, 오직 직접행동만이 빈민과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고 특히 여성들이 가정부로 머물러서는 안 되며, 주부의 역할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알려진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과 루시는 많은 부분에 동의했으나 세대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여성 억압을 자본주의의 기능으로 본 루시의 페미니즘은 노동계급적 가치에 기반을 둔 반면, 골드만의 페미니즘은 모든 것,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서 여성의 자유라는 추상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골드만의 페미니즘은 노동 계급의 기원과 무관했다. 골드만은 1890년대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주창된 페미니즘을 대표했는데 아나키스트들은 루시의 페미니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두 사람은 특히 결혼제도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루시는 결혼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옹호한 반면 골드만은 결혼이 여성을 억압한다고 하면서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설립

루시는 자본주의의 억압에 직접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중요한 이슈들이 있다고 하면서 1905년 유진 데브스, 마더 존스와 함께 미국 노동조합 운동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을 설립해 산업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 당시 시카고 경찰은 그를 “천명의 폭도보다 더 위험한” 사람으로 불렀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창립총회의 유일한 여성 연설자로서 루시는 여성을 ‘노예의 노예’라고 하면서 자신의 독립성과 인간성에 의해 개성을 주장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을 옹호하고, 총파업을 통한 공장의 접수, 즉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지도자 없이 노동자들이 평등하게 공장을 운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노동자들에 의한 공장의 자주관리와 이를 통해 사회를 자유연합으로 만들어갈 것을 주장한 생디칼리슴을 옹호한 그는 계급이야말로 억압적 사회체제를 작동시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캐나다 최초의 IWW 헌장. 출처=위키피디아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비롯한 모든 계급차별에 맞서 싸우던 루시 파슨스에게 미국 정부는 지속적인 탄압을 가했다. 감옥에 가두거나 연설을 금지하기도 했으며, 거리에서 아나키즘 잡지를 판매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루시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으로 1889년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언론의 자유가 있다는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금지되었다. 뒤에 도러시 데이, 존 리드, 노엄 촘스키, 헬렌 켈러, 유진 오닐, 게리 스나이더, 피터 시거 등이 참여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은 정부의 탄압으로 미국에서는 그 힘이 계속 약화되었으나, 그 조직은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루시는 시카고에서 IWW를 지원하는 아나키스트 신문인 <리버레이터(Liberator)>를 편집하면서 빈곤과 실업을 둘러싼 계급투쟁에 관심을 두었고, 1915년 1월에는 시카고 기아 시위를 조직하여 미국 노동 연맹, 사회당, 제인 아담스의 헐 하우스가 2월 12일 대규모 시위에 참여 하도록 촉구 했다. 파슨스는 "미래의 파업에 대한 나의 개념은 파업하고 나서 굶어 죽는 것이 아니라 파업하고 남아서 필요한 생산 자산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루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반제국주의 반전운동을 전개했고, 1925년에는 1927년에 노동 운동가와 Scottsboro Nine 및 Angelo Herndon 과 같이 부당하게 고발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변호하는 공산주의 주도 조직인 국제 노동 방어 전국 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뉴딜정책과 루스벨트의 민주당에 동조한 주류 노동조합인 ‘미국노동연맹-산별노조협의회’(AFL-CIO)와도 항상 거리를 두었다. 뉴딜정책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혁명을 막으려는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파슨스가 1939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전기적 설명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만, 공산당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발표한 부고에서 그녀가 당원이었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1942년 89살로 루시가 죽었을 때 경찰은 그가 남긴 것을 모두 압수하여 없애버려서 누구도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27년 뒤인 1969년, 보스턴 시내에 그녀의 이름을 건 책방이 생겼다. ‘주인도 없고, 보수도 없다’는 표어 아래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그 서점에서 쏟아져 나온 파슨스 관련 서적들과 함께 아나키즘 책들을 읽은 추억이 있다. 보스턴을 비롯하여 미국의 많은 진보적 서점들이 문을 닫았는데 루시 파슨스 센터 서점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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