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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80년대를 말하지 말라
쉽게 80년대를 말하지 말라
  • 권성우 숙명여대
  • 승인 2006.08.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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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누구나 자신의 역사적 체험에 기대 당대를 해석한다. 가령,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 박해일이 분한 왕년의 운동권 청년이 화염병을 던지면서 괴물과 대결하는 모습은 감독의 역사적 기억과 그 무의식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 장면을 통해 80년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하고 있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복잡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80년대에 대한 조롱이면서도 동시에 소중한, 생래적인 기억이 아닐까. 80년대나 386세대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사족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그 의미를 최소한이라도 교감하는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영화를 살리는 빛나는 메타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괴물’의 관객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무의식을 재확인하지 않을까 싶다.

386세대(실제로는 486세대) 운동권과 80년대의 역사적 체험에 대한 지독히도 부정적 편견이 난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엄연한 정황들이 존재한다. 일부 386세대 정치인의 변절, 정권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일부 386세대의 행태, 80년대의 체험과 기억에 상대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정권의 난맥상 등이 이제 386세대와 80년대의 역사적 기억을 결코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정황의 중요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덧붙여 사회 전반적으로 불어 닥치는 탈역사, 탈이념의 흐름은 80년대의 저항운동을 이제는 청산해야 할 낡은 유산으로 간주하기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리라.

최근 386세대 문학평론가들이 모인 한 좌담에서 한 평론가는 “80년대적 담론에 대한 반감”, “80년대의 저항운동이 가진 억압성의 거부감”이 80년대와는 다른 이 시대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라고 밝힌 바 있다(?문학의 시대 이후의 문학비평?, ‘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뉴라이트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사회 전반적으로 80년대와 운동권 386세대를 희생양 삼아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입지를 정당화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물론 모든 것을 변할 수밖에 없고, 사회운동이나 문화 역시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 부합되는 창조적 갱신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담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80년대와 386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실상 80년대의 자식인 그들은 그 자신의 기원이기도 한 80년대를 너무나 경박한 방식으로 무덤에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부정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이 80년대와 386세대에게도 명암이 있다.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의 화신이 된 386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소수자와 사회적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386도 많다. 80년대와 386의 문제점 못지않게 그 시절, 그 연대, 그 세대가 성취한 소중한 것들이 있다. 예술과 학문을 역사적 안목과 사회학적 상상력 속에서 사유하는 태도, 공동체 및 대의를 위한 헌신, 연대(連帶)의 중요성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러한 덕목이 물론 80년대와 같은 방식으로 그대로 유지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공동체 및 대의를 위한 헌신이 어느 순간 한 정파나 집단의 사적인 욕망으로 전화되는 모습도 우리는 자주 지켜보았다. 그러한 역설에 대한 차분한 응시가 필요하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더욱 정교하게 전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진전을 비롯해서 80년대가 성취한 소중한 가치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편향이자 정파적인 태도가 아닐까. 사실 지금 우리사회가 누리고 있는, 백화제방(百花齊放)으로 표현될 수 있는 다양한 담론들, 사소한 정치인의 언행조차도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는 비판적 사유의 진전 등이 바로 80년대의 역사가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야 정말 80년대의 대차대조표를 면밀하게 만들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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