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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학은 과연 끝났는가” … 逃避하는 비평가들
“근대문학은 과연 끝났는가” … 逃避하는 비평가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8.26 01: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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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풍경_문예지 가을호 특집 리뷰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전한 이후 평단이 한참 북적북적하더니 이 언명에 동의하느냐 않느냐를 두고 헤쳐모이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말 ‘미래파’(문학과지성사)라는 평론집을 통해 새로운 시의 시대를 외친 문학평론가 권혁웅, 문학평론가 김형중 등 계간 ‘문예중앙’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권 씨는 앞의 책에서 우리 문학평론이 ‘주제론’으로 치우쳐 시를 왜곡했다며 “비평은 가장 먼저 감각의 논리를 재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김형중은 ‘기어라 비평’이라는 글에서 작품 옆에 바짝 드러누워서 세밀하게 젖어들어야 한다고 축축하게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조차 사석에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과격하고 즉자적인 연상들, 욕설들, 환상들이 호기롭게 선언한다고 명쾌하게 해석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여기에 힘을 얻었는지 소설가 손홍규는 한 좌담에서 “문학이 죽었다고 그러는데 왜 우리가 예전의 문학 관념을 따라야 하느냐. 우린 전혀 다른 걸 한다”라고 항변성 발언을 던졌다.

하지만 권혁웅의 ‘미래파’를 두고 최근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젊은 문인들이 평론집 한권에 동원되고 있다”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사실 손홍규는 소 싸움꾼인 주인공이 수십 년 소와 살아가면서 어느 날부터는 먹은 걸 되새김질하고, 광대뼈도 툭 불거지는 등 영락없는 소의 꼴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시골 농지거리를 섞어가며 재미있게 다룬 바 있다.

그의 소설공간은 재래식 문학의 정서를 완벽하게 소화했다는 점에서 요즘 운위되는 신세대와는 다르다. 그런 점에서 이명원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이런 저간의 상황 때문인지 최근 나온 ‘실천문학’과 ‘문학동네’, ‘문학수첩’ 같은 문예지들의 특집이 더욱 대비되어 읽힌다. 먼저 ‘실천문학’은 ‘지구적 자본주의와 약소자들’이라는 대형특집을 선보였다.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이 리포터가 되어 외국인노동자나 장애인들을 만나보고 문학적인 글로 풀어내는 장면은 아주 읽을 만하다. 잡지들에서 흔하게 보는 인터뷰와 달리 감정과 표현을 제어할 줄 아는 高手들이기에 풍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인들이 밖으로 다니면서 현실을 껴안는 모습도 요즘의 공상 분위기를 깬다는 차원에서 신선했다.

그리고 연이어 실린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의 ‘연대의 사잇길: 보편-개체의 계선을 넘어서’는 오늘날 삶이 어떻게 人紋을 드리울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은 특히 다가온다. 인문적 삶은 나태한 보편주의도 아니지만 “개체의 개성과 순발력 자체가, 차이와 이탈 자체가 목적으로 둔갑하는 도착적 반응양식도 아니다”라는 것. 김 교수는 “알튀세가 말한 바, 착한, 말썽부리지 않는 계몽된 개인주의자의 이기심은 이데올로기적 효과 아래 이미 체계와 사통한 삶일 뿐”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러한 시야에 ‘문학동네’ 가을호가 준비한 ‘문학의 시대 이후의 문학비평’이란 좌담회가 쏙 들어오는 건 왜일까. 문학평론가 김영찬, 김형중, 류보선, 이광호가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비평에 대해, 그리고 한국문학의 특질과 가치를 두고 논의했다.

일단 서로의 비평이 갖는 장점과 한계를 말하는 부분은 예상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 재미가 별로 없다. 그런데 다음 두가지 점이 눈길을 끈다.

먼저 “이제는 문학비평이 아니라 비평의 본질 자체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이광호의 말이다. 이는 “문학 외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포석인데 그의 최근 비평행로로 보건대 대중문화 장르와 문학을 넘나들면서 잡식성 비평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비평’ 자체를 고민하면서 외부로 시선을 돌린 결과가 늘 해오던‘대중문화론’이니 대략 난감이다.

또 하나 가슴이 철렁한 발언은 김형중의 입에서 나왔다. 자신이 작품을 과장되게 해석하고 네이밍한 것이 사실 ‘의도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고백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지 확신할 수 없는데 일단 질러본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김영찬도 마찬가지인데 “2000년대 문학은 90년대 문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이라는 자신의 진단이 최근 위축된 문학담론을 활성화시켜보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

문제는 이런 담화의 정치적 계산이 그들 비평의 본질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때에 따라 비평적 입지가 되었다가 그냥 해본 말이 되었다가 하면 어떻게 발언의 권위가 생길까.

그 외에 ‘문학수첩’은 ‘서사의 탈주, 그 이후의 알리바이들’이란 특집을 내세웠다. 그러나 4편의 글이 실린 이번 특집은 한마디로 원 스트라이크 쓰리 볼이다.

‘역사소설의 세계 텍스트화’를 발표한 공임순은 요즘 역사소설이 역사를 상품화해서 후기자본주의 논리를 과거로 확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 김영하의 ‘검은 꽃’, 김별아의 ‘미실’이 통박되고 있는데, 특히 성적 표현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세 소설의 情事 장면을 인용하면서 “서로 공모하지 않았으면 어찌 이리 똑같을까”라고 비판하는 부분은 가관이다.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느냐의 문제이거늘, ‘육체의 열림’에 초점을 맞춘 김훈의 묘사와 ‘상황’을 제시하는 김영하의 묘사, 심리를 보여주는 김별아의 차이를 무시하고 성 표현을 했다고 묶어서 대접하면 문학은 실종되지 않을까.

또한 중요한 대목마다 성찰되지 않은 인식의 상투형들을 삽입해 놓았다. 가령 “김훈의 ‘이순신’은 삶과 죽음이 결판나는 역사적 현장인 전장에서조차 행동하기보다 사색한다”고 말한다. 깨놓고 말해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인간이라면 생각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사색은 조용히 서재에 앉아서 하는 것이라는 상투형을 가져다 쓴 것이다. 이순신이 ‘뇌가 비대해진 현대인’을 닮았다는 얘기도 전혀 그럴듯하지 못하다. 현대인은 어딜 봐도 과거 성리학자나 양반들보다 더 머리를 많이 쓰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전문학의 행방’을 다룬 문학평론가 차혜영의 글은 고민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최근 왜 평전이 많이 나오는가에 대한 해석이 일면적이다. 전태일, 문익환 평전으로 볼 때 “70~80년대 억압된 것들의 귀환”이라는 해석인데, 일부는 설명되지만 전체 분위기를 말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평전의 붐은 뒤늦게 개화한 한국의 인문출판이 한국의 지성사에 결핍된 과정, 즉 ‘위인전’이 아닌 ‘평전’이라는 비판적 자기인식의 과정을 추체험하려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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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랄라 2006-09-19 18:14:24
개인블로그기사인줄 알았네요...기자가 좀 나름의 객관적 거리를 두고 기사를 썼으면 싶네요...